유랜시아 책 - 제 146 편 갈릴리의 첫 번째 설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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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랜시아 책    

부 IV.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제 146 편 갈릴리의 첫 번째 설교 여행    



   제 146 편 갈릴리의 첫 번째 설교 여행  

146:0.1 (1637.1) 갈릴리에서의 첫 번째 대중 설교 여행은 서기 28년 1월 18일 일요일에 시작되어 3월 17일에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것을 끝으로 약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 여행에서 예수와 12 사도들은 이전의 요한의 사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림몬, 요타파타, 라마, 스블론, 이론, 케자리아, 코라진, 매돈, 가나, 나인, 엔도르 등지에서 복음을 설교하였으며,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은 이들 도시들에서 체재하면서 가르쳤고, 한편 많은 작은 도시들에서는 지나가면서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146:0.2 (1637.2) 예수가 자신의 연관-동료들에게 거리낌 없이 설교하도록 허락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여행에서 그는 단지 세 가지의 주의를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나사렛을 멀리하라는 것과 가버나움과 티베리아스를 지나칠 때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사도들은 그들이 자유로이 설교할 수 있고 제약 없이 가르칠 수 있게 되어 매우 만족함을 얻었으며, 복음을 설교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에 큰 열성과 기쁨을 가지고 헌신하였다.

  제 1 장. 림몬에서의 설교  

146:1.1 (1637.3) 소도시인 림몬은 한때 바빌론의 대기의 하느님인 람만을 경배하는 데에 전념했었던 적이 있었다. 많은 초기 바빌론 사람과 후대 조로아스터 교도들의 가르침들에는 여전히 림몬 자손들의 믿음들을 포옹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와 24 명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옛날 믿음과 왕국의 새 복음에 대한 차이점을 명백하게 설명해주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베드로가 그의 초기 생애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훌륭한 설교들 중의 하나인, “아론과 금송아지”에 대한 설교를 이곳에서 하였다.
146:1.2 (1637.4) 많은 림몬 시민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 그들 형제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하나의 독자적인 생애의 짧은 기간 동안에 자연 경배자들을 영적 이상(理想)을 찬미하는 충분한 동료관계로 전환하기는 어렵다.
146:1.3 (1637.5) 바빌론 사람들의 좀 더 좋은 점과 페르시아인 들의 많은 관념들, 밝음과 어두움, 선과 악, 시간과 영원이라는 것들이 나중에 소위 그리스도교라고 불리게 된 교리들과 합쳐졌다. 그러한 사상들의 개입은 좀 더 빠르게 근동 지역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눈에 보이거나 물질적인 모든 사물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틀, 또는 관념적 영에 대한 많은 플라톤의 이론들이 포함된 것이, 후에 필로에 의해 히브리 신학에 적용되었던 것처럼, 바울의 그리스도교 가르침들을 서방의 그리스인들에게 좀 더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해주었다.
146:1.4 (1637.6) 토단이 처음으로 왕국의 복음을 알게 되었던 곳이 림몬이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 메시지를 메소포타미아와 그 밖으로까지 전달하였다. 그는 유프라테스 너머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설교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제 2 장. 요타파타에서  

146:2.1 (1638.1) 요타파타의 일반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말을 기쁘게 들었으며, 또한 많은 이들이 그 왕국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한편, 그들이 이 작은 도시에서 체류하던 둘째 날 밤에 예수가 24 명들에게 주었던 강연은, 이 요타파타에서의 사명활동을 다른 곳과 구별되는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다니엘이 마음속에서 기도와 감사와 경배에 관한 주(主)의 가르침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좀 더 장시간 설명하였다. 현대 용어로 요약해보자면, 이 강연은 다음의 점들을 강조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146:2.2 (1638.2) 1. 사람의 가슴 속에서 의식적이고도 끈질기게 사악한 불의를 생각하면, 사람과 조물주사이에 영적 교통의 순환회로와 인간 혼이 기도로 연결되는 것을 단계적으로 파괴한다. 자연히 하느님은 자기 자녀의 탄원을 듣고 계시지만, 인간의 가슴이 사악한 불의의 개념을 자의적이고 그리고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담고 있으면, 이 세상의 자녀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 사이의 개인적 교제는 단계적으로 연이어서 없어진다.
146:2.3 (1638.3) 2. 이미 알려져 있고 확립된 하느님의 법들과 일치하지 않는 기도는 파라다이스 신(神)들에게는 하나의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만약 하느님들께서 영적, 마음적, 물질적인 법들에 의거하여 자신들의 창조에 말씀할 때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는다면, 창조체들의 그러한 고의적이고 의식적인 오만한 행위는, 그러한 법을 지키지 않고 복종하지 않는 필사자들의 개인적 탄원들을 듣고 있던 영적 개인성들의 귀를 떠나가게 한다. 예수는 자기 사도들에게 스가랴 예언서로부터 글을 인용하였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어깨를 돌리며,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그렇다. 그들이 그 가슴을 돌과 같이 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나의 영으로 보낸 나의 법과 말들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악한 생각의 결과가 그들의 죄있는 머리 위로 큰 천벌을 불렀다. 그들이 자비를 구하는 소리가 들려 왔으나, 거기에는 그것을 들을 어떤 귀도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지혜로운 사람의 속담을 인용하였다: “신성한 법을 듣지 않는 자에게는, 그의 기도까지도 혐오스러운 것이 되리라.”
146:2.4 (1638.4) 3. 하느님-사람간의 교통의 통로에서 인간 쪽을 열어 놓자마자, 필사자들은 창조 세상으로 언제나-흐르는 신성한 사명활동의 흐름을 즉각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사람이 그들의 가슴속에서 하느님의 영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러한 체험의 본질은 바로 하느님께서 동시에 사람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한다. 죄의 사함까지도 이와 똑같은 틀림없는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하였지만, 그러한 용서는 너희가 너희 형제들을 용서하기 전까지는 너희의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 속에서 이어질 수 없다. 하느님의 사실적인 용서는, 너희가 너희의 형제를 용서하는 것에 의해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체험 안에서 그것은 정확하게 그렇게 조건이 갖추어진다. 그리고 신성한 그리고 인간적 용서가 동조한다는 이 사실은, 예수가 사도들에게 가르쳤던 기도 속에서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고 함께 연결되어져 있었다.
146:2.5 (1638.5) 4. 우주 안에는 공의의 기본적인 법칙이 있으며, 자비가 이것을 피해 갈 아무런 힘이 없다. 시간과 공간의 영역의, 철저하게 이기적인 창조체는 파라다이스의 사심-없는 영광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조차도, 생존하기를 선택하지 않는 어떤 필사 창조체에게도 영원한 생존의 구원을 강요할 수 없다. 자비는 증여에서의 엄청난 허용범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자비와 통합된 사랑이라 할지라도 효과적으로 취소할 수 없는, 공의의 명령들이 있다. 예수는 다시 히브리 성서에서 인용하였다: “내가 불렀지만 너희가 듣기를 거부하였고; 내가 손을 폈지만 돌아보는 자가 없었다. 너희가 나의 모든 조언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가 나를 찾을 때에 이러한 반역적인 태도로 인하여 대답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생명의 길을 배척하였으므로, 너희가 고통을 당할 때에 나를 간곡히 구하여도 너희는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146:2.6 (1639.1) 5. 자비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자비를 내보여야만 한다; 심판을 하지 않아야 너희가 심판 받지 않게 된다. 너희가 그것으로 남을 심판하는 그 영으로, 너희가 마찬가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자비는 우주의 공정성을 전적으로 파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지막에는 참인 것이 증명될 것이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막는 자는 누구나, 그 역시 언젠가는 도움을 부르짖을 것이고, 그 때에 아무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모든 기도의 진지함은 그것을 듣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모든 탄원의 영적 지혜와 우주적 일관성이 응답의 시기, 방식, 그리고 정도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신의 무지하고 경험없는 자녀들의 어리석은 기도들에 대해서 글자 그대로 대답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그러한 터무니없는 탄원을 드리면서 많은 기쁨과 실제 혼의 만족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146:2.7 (1639.2) 6.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전적으로 봉헌하게 되면, 너희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에 충만하게 부합될 것이고 그리고 아버지의 뜻은 언제나 그의 광대한 우주에 두루 언제까지나 현시되고 있기 때문에 너희의 모든 청원에 대한 대답은 나타날 것이다. 진실한 자녀가 원하고 무한한 아버지께서 뜻하는 것들은 존재한다. 그러한 기도는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수 없으며, 그리고 다른 어떤 종류의 청원도 도저히 충분하게 응답될 수는 없다.
146:2.8 (1639.3) 7. 정의로운 자의 외침은 하느님의 자녀의 신앙 활동이며, 이것은 선함, 진리, 그리고 자비로 가득 찬 아버지의 창고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좋은 선물들은 아들의 접근을 그리고 개인적 전용이 되기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있어 왔다. 기도는 사람을 향한 신성한 태도를 변하게 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변함없는 아버지를 향한 사람의 태도를 변하게 한다. 기도의 동기가 신성한 귀에 이르는 통행권을 주는 것이지, 기도하는 자의 사회적, 경제적, 또는 외관상의 종교적 지위가 통행권을 주는 것이 아니다.
146:2.9 (1639.4) 8. 기도가 시간의 단축이나 혹은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기 위하여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웅대해지는 자아를 위한 것이거나 자기 동료들보다 높은 상태에서 자신의 부당한 이익을 얻기 위한 기법으로 이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혼은 진정한 의미의 언어로 기도할 수 없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너희의 최극의 기쁨이 하느님의 성격 안에 있게 하라, 그러면 그가 네 가슴의 진지한 소원을 너희에게 분명히 이루어 주시리라.” “너의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를 신뢰하라, 그러면 그가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궁핍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가난한 자들의 기도를 참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46:2.10 (1639.5) 9.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그러므로 만약 너희가 아버지께 무엇에 관하여 구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나의 이름으로 요청해라, 그러면 내가 나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너희의 실제 필요와 소원들에 맞추어 너희를 위하여 대신 탄원하여 줄 것이다.” 기도를 함에 있어서 자아-중심적이 되려는 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는 것을 피하고; 너희 형제들의 영적 향상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라. 물질적인 기도를 피하고; 영 안에서 그리고 영의 풍성한 선물들을 위하여 기도해라.
146:2.11 (1639.6) 10. 너희가 병든 자와 고난당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너희의 기도가 이들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필요로 하는 사랑이 넘치고 그리고 지능적인 사명활동을 대신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의 가족, 친구, 동료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되, 특별히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랑이 넘치는 기도를 해라. “그러나 기도할 때에,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너희 안에 거하는 영(靈)이 너를 움직여, 영들의 아버지와 맺는 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그러한 탄원들을 말하게 할 것이다.”
146:2.12 (1640.1) 11. 많은 호소가 단지 문제에 있을 때에만 기도한다. 그러한 실천 관행은 경솔하고 잘못 인도된 것이다. 너희가 곤란에 처했을 때 기도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너희는 또한 너희의 혼과 함께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도 너희의 아버지께 자녀로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너희의 실제 탄원은 항상 남 몰래 드리도록 해라. 다른 사람들이 너희의 개인적 기도를 듣게 하지 마라. 감사함의 기도는 경배자의 집단에게 적절하지만, 혼의 기도는 개인적 문제이다.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합당한 기도의 형식은 단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46:2.13 (1640.2) 12.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늘의 왕국의 확장을 위하여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히브리 성서들에 기록된 모든 기도들 가운데에서, 그는 시편 기자들의 기도들에 대하여 가장 긍정적으로 논평하였다: “하느님이여, 내 속에 깨끗한 가슴을 창조하고, 내 안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은밀한 죄들로부터 씻어 주시며, 당신의 하인을 외람된 범죄로부터 붙잡아 주십시오.” 예수는 경솔하고 죄를 범하는 말투로 기도하는 것에 관련하여 매우 길게 이야기하면서 다음의 글들을 인용하였다: “오, 주님,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주십시오.” “인간의 혀는 사람이 거의 다스리기 힘든 신체의 일부이지만, 내주하는 영만이 이 걷잡을 수 없는 몸의 일부를 부드러운 관용의 음성과 자비의 영감 어린 사명활동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예수가 말씀하였다.
146:2.14 (1640.3) 13. 예수는 땅에서 사는 일생의 여로에서 신성한 안내를 구하기 위한 기도가, 아버지의 뜻을 알고자 탄원하는 기도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실체 안에서 이것은 신성한 지혜를 탄원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예수는 결코 기도로 인간의 지식과 특별한 기술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도가 사람이 그 신성한 영의 현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능력이 커지는 것의 한 요소가 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가 연관-동료들에게 영과 진리 속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을 때, 그것은 그 사람의 깨우침의 정도에 따라서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 전심을 다하여 지능적으로, 열심히 그리고 확고하게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146:2.15 (1640.4) 14.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화려한 문체를 사용한 반복, 유창한 말, 금식, 참회, 희생물이 기도를 좀 더 효과적으로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신자들에게 감사함을 통하여 진정한 경배로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하라고 간곡히 권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의 기도와 경배에서 감사의 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한탄하였다. 그는 이 경우에 관해 성서에서 글을 인용하였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지고자의 이름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며, 매일 아침마다 그의 자애로움을 인정하며, 매일 밤마다 그의 진실하심을 인정하는 것은 유익한 일인데, 이는 하느님께서 그가 일을 통하여 나를 기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나는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릴 것이다.”
146:2.16 (1640.5) 15. 그러고 나서 예수가 말씀하였다: “너희의 일상적인 필요에 관하여 계속적으로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일어나는 문제들로 너무 염려하지 말라, 또한 이러한 모든 일들에 있어, 너희의 진지한 감사의 영과 함께, 기도와 간청으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앞에 펼쳐지도록 하라.” 그러고 나서 그는 성서에서 이렇게 인용하였다: “내가 노래로 하느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느님을 광대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주님을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다.”
146:2.17 (1641.1) 16.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아버지에게 기도를 드렸을 때는, 내주하고 있는 영이 듣고 있는 혼에게 말하는 더 좋은 기회를 여유롭게 제공하도록, 고요한 접수성 안에서 한동안 남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버지의 영은 사람의 마음이 진정한 경배의 자세를 취할 때 사람에게 이야기하기가 가장 좋다. 우리는 아버지의 내주 하는 영의 도움으로 그리고 진리의 사명활동을 통한 인간 마음의 광채로 하느님께 경배를 드린다. 예수는, 경배가 사람으로 하여금 경배를 받는 분을 점점 더 닮아가도록 해준다고 가르쳤다. 경배는 유한자가 무한자의 현존으로 점점 더 다가가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달성하는 그러한 변환하는 체험이다.
146:2.18 (1641.2) 예수는 사람과 하느님과의 교통에 관한 다른 많은 진리들을 사도들에게 말씀하였지만, 그들 중 많은 이가 그의 가르침을 충분하게 품지는 못하였다.

  제 3 장. 라마에 들리심  

146:3.1 (1641.3) 예수는 라마에서 연로(年老)한 그리스 철학자와 기억에 남을 만한 토의를 하였는데, 그 철학자는 과학과 철학만으로도 인간 체험의 필요성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가르쳤었다. 예수가 이 그리스 선생의 말에 인내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으며, 그의 말의 많은 부분들이 진리임을 인정하였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 예수는 단지 그가 인간 실존의 토의에서 “어떻게, 왜, 어디로”를 설명하는 것을 빠뜨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네가 끝낸 지점에서 우리는 시작한다. 종교는 마음 혼자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거나 충분히 헤아릴 수 없는 영적 실체들을 다루는, 사람의 혼에 대한 계시이다. 지적(知的)인 분투가 생명의 사실들을 나타낼 수도 있겠지만, 왕국 복음은 존재에 관한 진리들을 밝혀준다. 너는 진리에 대한 물질적인 그림자들을 언급하였다; 이제 내가 필사 실존의 물질적인 사실들에 대한 이러한 과도기적인 시간의 그림자들을 벗어버린, 영원하고 영적 실체들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들어보겠느냐?” 한 시간 이상 동안 예수가 이 그리스인에게 왕국 복음의 구원의 진리들을 가르치셨다. 그 연로한 철학자는 주(主)의 접근 방법에 쉽게 따라 왔으며, 진정으로 정직한 본심의 자세로 구원의 복음을 빨리 믿었다.
146:3.2 (1641.4) 사도들은 예수가 공공연하게 그리스인의 많은 주장들에 찬성하는 태도 때문에 약간 당황하였지만, 예수는 나중에 사적(私的)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그리스인의 철학에 관용을 베풀었다고 해서 놀라지 마라. 참되고 순수한 내적 확신은 외부적인 분석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한 진리는 정직한 비판을 받는 것에 대해 화내지 않는다. 편협함은 자기의 믿음에 담겨있는 진실함을 스스로 은밀하게 의심하고 있음을 감싸 감추는 가면이라는 점을 너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믿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완전한 자신감이 있을 때에는, 그는 어떤 경우에도 이웃의 태도 때문에 혼란스러움을 겪지 않는다. 용기는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한 그 일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정직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참된 신념과 숭고한 이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46:3.3 (1641.5) 라마에서 머물던 둘째 날 저녁에 도마가 예수께 물었다: “주(主)여, 어떻게 해야 새 신도들이 당신의 가르침 안에서 이러한 왕국 복음의 진리를 실제로 알고 또 실제로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146:3.4 (1641.6) 그리고 예수가 도마에게 대답하였다: “너희가 아버지의 왕국에서 가족이 되었다는 것과, 왕국의 자녀들로서 영원히 생존할 것에 대한 너희의 확신은 전적으로 너희의 개인적 체험─진리의 말씀에 대한 신앙─의 문제이다. 영적 확신은 신성한 진리의 영원한 실체들 안에서의 너희의 개인적 종교 체험과 동등한 것이며, 또한 한편으로는 진리의 실체에 대한 너희의 지적 납득과 너희의 영적 신앙을 합하고 그리고는 너희의 솔직한 의심들을 뺀 것과 똑 같다.
146:3.5 (1642.1) “아들은 자연적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자질로서 부여받는다. 너희가 아버지의 살아있는 영을 자질로서 부여받았기 때문에,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너희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인,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과 정체성이 확인되기 때문에, 너희 생명은 육신을 가진 물질 세상에서 살아남는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아버지로부터 오기 이전에도 이러한 생명을 살아 왔는데, 이제 나의 말을 믿음으로 인하여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내가 분명히 말하겠는데,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나면, 그가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의 영을 보내실 것이다.
146:3.6 (1642.2) “너희는 너희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그 신성한 영을 볼 수 없기는 하지만 너희에게는, 너희 혼이 가진 힘의 통제을, 이렇게 깃 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의 가르침과 인도에 네가 복종하고 있는 그 정도를 알아보는 실천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의 동료들에 대한 너희의 사랑의 정도이다. 아버지의 이 영은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어 갖고 있으며, 그것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어김없이 거룩한 경배로 인도하고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사랑을 갖게 한다. 처음에는 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너희가 아버지의 내주 하는 현존의 인도를 좀 더 의식하게 되어, 너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지만; 곧 진리의 영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질 것이며, 지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에게 진리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사람들 안에 거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의 영은 너희 혼들의 영적 자질을 증명하고 있고, 또한 너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알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너희 안에 거하는 아버지의 현존, 너희의 영을 증명할 것이며, 그 다음에는 지금 일부의 사람들 안에서 거주하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들 안에 거하면서 너희에게 너희가 실체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말해 줄 것이다.
146:3.7 (1642.3) “이 영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세상의 모든 자녀마다. 결국에는 하느님의 뜻을 알 것이며,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자는 언제까지나 살 것이다. 너희에게는 이 세상 일생으로부터 영원한 영토로 가는 길이 평이하게 만들어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고, 그것은 항상 있어 왔으며, 그 길을 새롭고 생생하게 만들기 위하여 내가 왔다. 왕국에 들어오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그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 대부분은,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후에, 너희가 현재의 체험들을 회고해 볼 수 있을 때에,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46:3.8 (1642.4) 이러한 축복의 말들을 들었던 모든 이들은 기쁨이 넘쳤다. 의로운 자들의 생존에 관한 유대인의 가르침들은 혼돈스럽고 불확실한 것들이었으며, 예수의 추종자들은 진실한 믿는 자들의 영원한 생존으로의 확신에 대한 확고하고 긍정적인 이러한 말들을 듣고 신선함과 영감을 갖게 되었다.
146:3.9 (1642.5) 사도들은 설교하고 신도에게 세례 주는 일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집집마다 방문하는 실천을 지켜 나갔고,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고 병든 자와 고통 받는 자에게 사명활동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수의 사도 각자가 요한의 사도 한 사람씩을 연관-동료로 동반하게 되어, 그들의 사도 조직이 확대되었다; 아브너는 안드레의 함께 일하는 자로 일하였고, 이 방식은 그들이 다음 유월절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146:3.10 (1642.6) 스블론 체류 기간에 있었던 예수의 특별한 교훈은 주로 왕국의 상호간의 의무들에 대해 좀 더 깊이가 있는 토론과, 사회적 종교 의무에서의 친목과 개인적 종교 체험 간의 차이점들을 분명하게 해주려는 포옹하는 가르침이었다. 이것은 주(主)가 종교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 언급하였던, 몇 번 안 되는 경우들 중의 하나였다. 그의 지상 일생 전부를 통하여, 예수는 자기 추종자들에게 종교의 사회적인 면에 관해서는 거의 교훈을 준 적이 없었다.
146:3.11 (1643.1)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이방인이라고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스블론에는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으며, 그들은 예수가 가버나움에서 병자를 고친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실제로 예수를 믿는 자는 몇 사람 없었다.

  제 4 장. 아이론에서의 복음  

146:4.1 (1643.2) 갈릴리와 유대 지방의 많은 다른 작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론에도 회당이 있었는데, 이러한 회당들에서 안식일 설교를 하는 것은 예수의 초기 사명활동 기간 동안 그에게 하나의 관습처럼 되어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가 아침 봉사예배의 설교를 맡고,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 중의 하나가 오후에 설교하였다. 또한 예수와 사도들은 회당의 주중 저녁 모임에서도 자주 가르치고 설교하였다. 예수에 대한 예루살렘 종교 영도자들의 반목이 점점 더 증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도시 외곽에 있는 회당의 일에는 직접적으로 통제하지 않았다. 예수의 대중 사명활동으로 인하여 예수에 반대하는 정서가 그처럼 폭넓게 퍼질 수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 모든 회당에서 금지 당했던 것은 더 나중에 가서였다. 이 당시에는 갈릴리와 유대 지방의 모든 회당들이 그에게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146:4.2 (1643.3) 아이론은 그 당시에 상당한 양의 광물질을 생산하는 광산들의 소재지였으며, 예수는 광부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론에 머무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광산에서 보내셨다. 사도들이 가정을 방문하고 공공 장소에서 설교하는 동안, 예수는 광산 지하에서 광부들과 함께 일하였다. 병의 치유자로서의 예수의 명성이 이 외딴 동네에까지도 퍼져 있었고, 많은 병든 자들과 고난당하는 자들이 그의 손에 도움을 얻으려고 그를 찾아 왔으며, 많은 이들이 그의 치유 사명활동으로 크게 혜택을 입었다. 이 경우들 중에서 문둥병자의 경우를 제외하고 주(主)는 절대로 기적을 통하여 병을 치유하지 않았다.
146:4.3 (1643.4) 이론에서의 셋째 날 늦은 오후에, 예수가 광산으로부터 그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좁은 골목길을 우연히 통과하게 되었다. 그가 한 문둥병자의 지저분한 오두막집에 가까이 왔을 때, 병을 치유하는 사람으로서의 명성을 들은 이 고통당하는 자는 예수가 자기 집 문 앞을 지나가시자, 그에게 감히 다가가 꿇어 엎드려 탄원하였다: “주님,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의 메시지를 저는 들어왔으며, 제가 깨끗케 될 수만 있다면, 저도 그 왕국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문둥병자들은 회당에 참석하거나 대중 경배에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방법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실제로 자기가 문둥병에서 깨끗케 되지 않고는, 절대로 다가오는 왕국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예수는 고난당하는 그를 보셨고 그러한 신앙의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인간 가슴이 감동되었고 신성한 마음이 연민으로 움직였다. 예수가 그를 바라보자 그 사람은 고개를 숙여 경배하였다. 그러자 주(主)가 자기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면서 말씀하였다: “내가 원하니─깨끗해져라.” 그러자 즉시로 그가 치료되었고; 문둥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
146:4.4 (1643.5) 예수가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명령하였다: “누구에게도 아무 말 하지 말고 조용히 가서 네 몸을 사제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케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한 제물을 드려서 저희에게 증명해라.”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가 지시한대로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온 동네에 다니면서 예수가 자기 문둥병을 고쳤다고 선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모든 동네 사람들이 그의 문둥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명하게 그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케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수가 그에게 사제에 가라고 한 훈계를 그는 듣지 않았다. 그가 예수가 자기를 고쳤다는 소식을 온 사방에 퍼뜨린 결과로 주(主)에게 많은 병자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주(主)는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그 동네를 떠났다. 예수가 다시는 그 도시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았지만, 광산 근처의 교외에서 이틀을 더 남아 있으면서 신도가 된 광부들에게 왕국 복음에 관하여 좀 더 가르침을 베푸셨다.
146:4.5 (1644.1) 문둥병자를 고친 것이 이때까지에서 예수가 의도적이며 고의적으로 행하였던 소위 말하는 첫 번째 기적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는 실제적인 문둥병자였다.
146:4.6 (1644.2) 그들은 이론에서부터 기스칼라로 가서 이틀 동안 복음을 전파한 후, 코라진으로 출발하였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거의 일주일 동안 기쁜 소식을 전하였지만; 코라진에서는 많은 신도들이 그 왕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예수가 가르치셨던 어떤 곳에서도 이곳처럼 그의 메시지가 개괄적인 거절을 당했던 적은 없었다. 코라진에서의 체류는 대부분의 사도들의 사기를 꺾어 놓았으며, 안드레와 아브너 자기 연관-동료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게 해서 조용하게 가버나움을 통과하면서 그들은 매돈 마을로 갔는데, 그곳 역시 거의 다름이 없었다. 모든 사도들의 마음속에서는, 자기들이 최근에 방문했던 마을에서 자신들이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에 실패하였던 이유는, 예수가 치유된 병자로 하여금 그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라는 관념이 만연했다. 예수가 또 다른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도록 그의 능력을 현시하기를 그들은 얼마나 바랐던가! 그러나 주(主)는 그들의 열렬한 간청에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제 5 장. 가나로 돌아옴  

146:5.1 (1644.3) 사도 집단은 예수가 “우리가 내일 가나로 갈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자, 매우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가나에서는, 그곳에서 예수가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크게 공감하는 청중을 가질 것이라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사람들을 왕국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던 셋째 날에, 가버나움의 유명 인사인 타이투스가 가나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아직 믿음이 부분적인 자였고, 그의 아들이 병들어 위독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는 예수가 가나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러 서둘러 그곳에 왔다. 가버나움의 신도들은 예수가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146:5.2 (1644.4) 이 유명 인사는 가나에 예수가 계신 곳을 알아내자, 그에게 빨리 가버나움으로 가서 병든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사도들이 숨을 죽이고 기대감에 차서 옆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병든 아들의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였다: “얼마나 더 오래 너희에게 참아야 하는가? 하느님의 능력이 너희 안에 있지만, 너희는 표적과 이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구나.” 그러자 이 유명 인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께 간청하였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 그러나 나의 아들이 죽기 전에 가 주십시오. 제가 떠날 때, 그 아이는 거의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침묵 속에서 명상을 하다가 갑자기 말씀하기를,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타이투스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가버나움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하인들이 그를 만나러 나와서 말하기를, “기쁨을 향유 하십시오─당신의 아들이 많이 좋아졌습니다─그가 살았습니다.” 그 때 타이투스가 그들에게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를 묻자, 종들이 대답하기를,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아버지는 그때가 예수가 “네 아들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던 시간이라는 것을 회상하였다. 그때 이후로 타이투스는 전심을 다 바쳐 믿었고, 그의 온 가족들도 또한 믿게 되었다. 이 아이는 왕국의 강력한 사명활동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로마에서 고난당하던 자들과 함께 목숨을 바쳤다. 타이투스의 온 집안사람과 친구들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이 에피소드를 하나의 기적으로 여겼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것은 육신의 병을 고친 기적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 법칙의 과정에 대한 그의 선험지식의 경우로써, 예수가 세례를 받은 이후에 자주 의존한 그러한 지식이었다.
146:5.3 (1645.1) 다시 한 번 예수는 가나로부터 떠나야만 하였는데, 두 번째의 에피소드로 인하여 지나친 관심이 이 동네에서 그의 사명활동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게다가 이제는 그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명 인사의 아들을 고친 셈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병자와 고난당하는 자를 데리고 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멀리서 고쳐 주기를 바란다는 메신저들을 또한 보내오기도 하였다. 온 지방이 일어나는 것을 보신 예수는, “나인으로 가자.”라고 말씀하였다.

  제 6 장. 나인과 과부의 아들  

146:6.1 (1645.2) 이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다; 기적을 찾는 세대였다. 이 무렵까지 중부와 남부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개인적 사명활동에 대하여 기적이 나타날 것을 고대해 오고 있었다. 순전히 정신적인 갈등이나 감정적인 혼돈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던 수많은 진실한 사람들도 예수의 현존 앞에 나왔는데, 그들은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았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적 치유 경우들에 대하여, 무지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진 이 사람들은 육체적인 치유, 기적적인 고침을 받았다고 여겼다.
146:6.2 (1645.3) 예수가 가나를 떠나 나인으로 가시려고 하자, 수많은 신도들과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기적과 이적을 보고 싶어 하였으며, 실망을 겪지 않게 되어 있었다. 예수와 사도들이 성문에 가까이 왔을 때, 근처의 공동묘지로 가고 있는 나인에 사는 한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 행렬과 마주쳤다. 이 여인은 매우 존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반 이상이 이 죽은 소년의 관을 메고 가는 사람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장례의 행렬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 앞까지 왔을 때, 과부와 그녀의 친구들이 주(主)를 알아보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가 인간의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는, 기적에 대한 높은 기대감으로, 그러한 치료자라면 왜 죽음에서도 살려낼 수 없겠는가!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한 괴로운 상황에서 예수는 앞으로 나아가 관의 뚜껑을 열고 그 소년을 조사하였다. 그 젊은이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현존이 되돌아 올 수 있는 그러한 비극임을 알아차리셨다; 그리하여 그는 그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씀하였다: “울음을 그쳐라. 너의 아들은 죽지 않았다; 그가 자고 있다. 그가 너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젊은이의 손을 잡고 “깨어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였다. 그러자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젊은이가 곧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후 예수는 그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셨다.
146:6.3 (1645.4) 예수는 무리들을 조용히 시키고, 그런 후 그 청년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과 그가 무덤으로부터 그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애쓰셨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를 따랐던 무리들과 나인의 온 동네는 감정적 흥분이 절정에 달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공포심이 엄습하였으며, 한편 나머지 사람들은 꿇어앉아 기도를 하거나 자기들의 죄에 대해 울부짖었다. 그리고 소란스러운 무리들이 해산된 것은 밤이 오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물론 그 소년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예수의 말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였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까지 말하였다. 예수가 그들에게 그 소년이 단지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고 말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은 평소 예수의 말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면서, 그가 항상 기적을 감추려고 엄청나게 겸손함을 보였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146:6.4 (1646.1) 그래서 예수가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냈다는 이 소문은 갈릴리 전역과 유대까지 퍼졌으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이들이 그것을 믿었다. 예수는 자기가 과부의 아들에게 깨어서 일어나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소년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자신의 사도들에게 충분히 납득시키실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충분하게 그들에게 강조했기 때문에, 누가의 기록을 제외하고는 모든 후대(後代)의 기록들에서 그 사건이 포함되지 않았다. 누가는 에피소드가 자신에게 관계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의사로서 너무나 많은 초대 요청을 받았기 때문에, 다음 날 일찍 엔도르로 출발하였다.

  제 7 장. 엔도르에서  

146:7.1 (1646.2) 예수는 육신의 병 고침을 원하는 소란스러운 무리들을 피하여 엔도르에서 며칠을 보내셨다. 이곳에서 그들이 체류하는 동안 주(主)는 사울 왕과 엔도르의 마녀에 대하여 사도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방황하고 있고 반역적인 중도자들, 때때로 죽은 자의 영들이라고 여겨진, 개인이-아닌 것으로 해왔었던 그 존재들은 곧 통제될 것이며, 그들이 더 이상 이러한 이상한 일을 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였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후에 그리고 자기들이 자신들의 영을 모든 육신들에게 쏟아 부어준 후에는, 그러한 반(半)영적 존재들─소위 더러운 영들이라고 불리는─은 필사자들 속에서 미약한 자들과 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더 이상 장악할 수 없다고 자기 추종자들에게 말씀하였다.
146:7.2 (1646.3) 예수는 자기 사도들에게, 인간 존재들로부터 떠나간 영들이 그들의 생존되고 있는 동료들과 교통하기 위하여 그들이 있었던 기원적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다만 한 섭리시대적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필사 사람의 진보된 영이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은 단지 예외적인 경우이고 그 행성의 영적 관리-행정의 한 부분으로서만 가능하다.
146:7.3 (1646.4) 그들이 이틀 동안의 휴식을 취했을 때, 예수가 사도들에게 말씀하였다: “그 지방이 조용해질 동안 우리는 내일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서, 거기에 머물면서 가르치도록 하자. 집에 가면 지금쯤 이러한 종류의 흥분에서 다소 회복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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