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33.1)하느님에 대하여 사람의 가능한한 가장 높은 개념이, 하나의 시원적이고도 무한한 개인성에 대한 인간의 관념과 이상 속에 포옹되므로 그만큼, 신(神)의 성격을 구성하는 신성한 본성의 어떤 특징들을 공부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고, 나아가 도움을 준다는 것이 입증될 수도 있다. 하느님의 본성은 네바돈의 미가엘이 육신으로 있는 동안 그의 다양한 가르침들 속에서 그리고 그의 장엄한 필사 삶에서 펼쳐 보였던 아버지에 대한 계시로 가장 잘 납득될 수 있다. 또한 만일 사람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파라다이스창조자를 참된 영적 아버지로 우러러 본다면 신성한 본성은 사람에 의하여 더욱 잘 납득될 수 있다.
2:0.2 (33.2)하느님의 본성은 최극 관념들의 계시 속에서 공부가 될 수 있고, 신성한 성격은 천상의 이상들에 대한 하나의 묘사로서 상상될 수 있지만, 신성한 본성의 모든 계시들 중 가장 잘 깨우쳐주고 그리고 영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신성의 충만한 인식을 달성하기 이전과 이후의, 나사렛 예수의 종교적 삶에 대한 이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만일 미가엘의 육신화 된 삶이, 사람에게 주는 하느님의 계시의 배경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우주 아버지의 개인성의 본성과 성격에 대한 인간 개념에서의 더욱 멀리 비치는 조명과 통일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는 신성한 본성에 관련되고 있는, 어떤 관념과 이상들을 인간의 언어 상징 안에 집어넣으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3 (33.3)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확대시키고 영성화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 있어서, 우리는 필사 마음의 제한된 수용능력 때문에 엄청나게 장애를 받는다. 또한 우리는 신성한 가치를 묘사하려는 그리고 유한자, 곧 사람의 필사 마음에게 영적 의미들을 제시하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조명이나 혹은 비교의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재료의 빈곤 때문에 그리고 언어의 한계 때문에, 우리의 임무 수행은 심각하게 장애를 받고 있다. 필사 마음 속에 증여되어있는 우주 아버지의 조절자가 내주하고, 창조자 아들의 진리 영이 가득 퍼져있다는 그러한 사실이 아니라면, 하느님에 대한 인간 개념을 확대시키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거의 쓸모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슴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개념의 확대를 도와주는 이들 신성한 영(靈)의 현존에 의존하면서, 나는 사람의 마음에게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더욱 자세한 묘사를 시도하라는 나의 맡겨진 명령의 집행을 즐겁게 시작한다.
1. 하느님의 무한성
2:1.1 (33.4)“무한자와 접하지만, 우리는 그를 찾아낼 수 없다. 신성한 발자취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의 납득은 무한하고 그의 위대함은 탐색할 수 없다.” 아버지 현존에서의 눈을 멀게하는 빛은, 그의 낮은 창조체들에게는 그가 마치 ”짙은 어둠 속에 거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생각들과 계획들을 탐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수없이 행한다.” “하느님은 위대하시다; 그처럼 우리는 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 탐색해낼 수도 없다.” “하느님이 정말로 땅 위에 거하겠는가? 보라, 하늘(우주)과 하늘들의 하늘(우주들의 우주)도 그를 담을 수 없다.” “그의 판단을 어찌 탐색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의 지나간 길들을 어찌 찾아낼 수 있겠는가!”
2:1.2 (34.1)“오직 한 분의 하느님만 계시다. 무한한 아버지, 그는 또한 신실한 창조자이시다.” “신성한 창조자는 또한 우주 결정자, 혼들의 근원이자 운명이다. 그는 최극 혼, 시원 마음이며 모든 창조의 무제한적 영이다.” “위대한 통제자는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그는 장엄과 영광으로 찬란하다.” “창조자 하느님에게는 두려움과 미움이 전혀 없다. 그는 불멸하고, 영원하고 자아-실존하며 신성하고 풍성하다.” “만물의 하늘 선조(先祖)는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심오하고 불가해한 분인가!” “무한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에서 가장 탁월하시다. 그는 시작이요 끝이며, 모든 선함과 완전한 목적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하며; 영원한 창조자는 원인들 중의 원인이다.”
2:1.3 (34.2)아버지의 영원한 우주 개인성의 엄청난 현시활동의 무한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무한과 영원 둘 모두에 대해 분별불가적으로 자아-의식 하며; 마찬가지로 그는 완전성과 힘을 충분히 아신다. 그는 우주에서 자신의 신성한 조화-협동자들을 제외하고, 자신에 대한 완전하고 엄밀하고 완벽한 평가를 체험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2:1.4 (34.3)아버지는 그의 주(主)우주의 다양한 구역들에서 때때로 변함에 따라 자신에 대한 각기 다른 요구의 필요를 끊임없이 그리고 반드시 충족시킨다. 위대한 하느님은 자신을 알고 납득하며; 그는 완전성의 모든 그의 시원의 속성들을 무한히 자아-의식 한다. 하느님은 조화우주의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그는 우주의 실험가도 아니다. 우주 주권자들은 모험에 들어갈 수 있고; 별자리 아버지들은 실험할 수 있고; 체계 우두머리들은 실천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주 아버지는 시작에서 끝을 알며, 그의 신성한 계획과 영원한 목적은 그의 광대한 권역의 모든 우주의 각 세계, 체계 그리고 별자리 안에 있는 그의 모든 종속들의 모든 실험들과 모든 모험들을 실재적으로 포옹하고 이해한다.
2:1.5 (34.4)하느님에게 새로운 사물이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어떤 조화우주적 사건도 전혀 놀라운 것이 될 수 없다; 그는 영원의 순환에 거주하신다. 그는 시작이나 끝나는 날이 없이 늘 계신다. 하느님에게는 그 어떤 과거, 현재,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이 어떤 주어진 순간에든지 현재이다. 그는 위대하며 유일한 스스로 이신 이이다.
2:1.6 (34.5)우주 아버지는 그의 모든 속성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그리고 분별된-자격이 없이 무한하다; 바로 이 사실이,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 유한한 물질적 존재들 그리고 다른 하급 피조 지능존재들과의 모든 직접적인 개인적 교통으로부터 그를 자동적으로 차단한다.
2:1.7 (34.6)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의 갖가지 창조체들과의 접촉과 교통을 위한, 운명지어진 그러한 주선을 필요로 한다; 첫 번째로, 신성에 있어서 완전함에도, 또한 행성종족들의 바로 그 살과 피를 가진 자연본성으로 때때로 함께 하는, 하느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개인성으로 너희들 중의 하나가 되고 너희와 하나가 되어; 그리하여, 말하자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기도 하고 사람의 아들이라고도 한 미가엘의 증여에서 발생하였듯이, 하느님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급 기원의 물질적 존재들에게 접근하고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돌보고 또한 그들에게 봉사하는 무한한 영의 개인성들, 세라핌천사군 들의 다양한 계층 그리고 기타 천상 지능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유란시아의 인간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예고 없이 그리고 설명 없이 보내지는, 내주하도록 보내지는 위대한 하느님 자신의 실재 선물인 미(未)개인적 신비 감시자들, 생각 조절자들이 존재한다. 끝없는 풍부함 안에서, 그들은 하느님-의식이나 또는 잠재적인 그러한 것의 수용능력을 소유하는 그러한 필사자들의 미천한 마음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리고 내주하기 위하여 영광의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온다.
2:1.8 (35.1)이러한 방법들 그리고 다른 여러 방법들로,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고 유한(有限) 이해력을 철저히 초월하는 방법들로,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사랑으로 그리고 기꺼이 내려오시며, 그리고 다른 한편 그의 창조체 자녀들의 유한 마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그의 무한성을 변형시키고 희석시키며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절대성을 점차 감소시키는 일련의 개인성 분배들을 통하여, 무한한 아버지는 그의 멀리 퍼진 우주의 많은 영역에 속한 다양한 지능존재들과의 가까운 접촉을 즐길 수 있게 된다.
2:1.9 (35.2)그의 무한성, 영원성, 그리고 시원성의 사실 그리고 실체로부터 조금도 낮아짐이 없이, 그는 이 모든 것을 행해왔고 지금도 행하며, 또한 행함을 영원토록 계속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 유란시아에 거주하는 그러한 창조체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충분히 납득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진실이다.
2:1.10 (35.3)최초 아버지가 그의 계획에서 무한하고 그의 목적에서 영원하기 때문에, 이들 신성한 계획과 목적을 전부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떤 유한 존재에게든지 선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필사 사람은 아버지의 목적들을 우주가 진보하는 연속 차원들의 완성되어지는 창조체 상승계획 수행과 이에 따라서 그들이 드러나는데 따라서, 오직 이따금, 여기저기에서, 얼핏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무한성의 의의(意義)에 에워싸여 있을 수는 없지만, 무한하신 아버지는 모든 우주 안에 있는 자신의 모든 자녀의 모든 유한을 가장 분명하고 충만하게 이해하고 사랑스럽게 포옹하신다.
2:1.11 (35.4)아버지는 수많은 상급 파라다이스 존재들과 신성과 영원을 공유하지만, 우리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그의 조화-협동 연관-동료들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와 무한성과 필연인 우주 시원성을 충만히 나누는지는 의문을 갖는다. 개인성의 무한성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개인성의 모든 유한성을 포옹하며; 따라서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갖는다.”라고 선언하는 가르침은 진리─글자 그대로 진리─이다. 필사 사람 속에 내주하는 우주 아버지의 순수한 신(神)의 그 단편은 첫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 아버지들의 아버지의 무한성의 일부분이시다.
2. 아버지의 영원한 완전성
2:2.1 (35.5)너희 옛 선지자들도 우주 아버지의 영원한, 시작도-없고, 끝도-없는 순환적인 본성을 이해하였다. 하느님은 자신의 우주들의 우주 안에 글자 그대로 그리고 영원히 계신다. 그는 모든 그의 절대 장엄과 영원한 위대함을 가지고 현재 순간에 거하신다. “아버지는 자신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시며,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시대에 두루 “모든 생명을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신성한 고결한-순수성 안에 무한한 완전성이 있다. “나는 주님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우주들의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가 빛들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행성 사이의 관련사들에 관한 그의 행위에는 “아무런 변동 가능성도 없고 변화의 그림자조차 없음”을 드러낸다. 그는 “시작에서 끝을 선언한다.” 그는 말씀 하신다: “나의 조언은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나의 아들 안에서 세운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나는 내가 기뻐하는 모든 일을 행할 것이다.” 그래서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계획과 목적은 그 자신처럼 : 영원하고 완전하며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다.
2:2.2 (35.6)아버지의 명령에는 완벽의 최종과 충만의 완전성이 있다. “하느님이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은 언제까지나 늘 그럴 것이다; 어떤 것도 거기에 더해질 수 없고 어떤 것도 거기에서 감해질 수 없다.”우주 아버지는 지혜와 완전성에 대한 그의 기원적 목적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의 조언들은 확고하고 그의 의도는 변경되지 않으며, 동시에 그의 행위들은 신성하고 오류가 없다. “그에게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시간과 같다.” 신성의 완전성과 영원의 장엄함은 필사 사람의 제한된 마음으로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언제까지나 초월한다.
2:2.3 (36.1)변함없는 하느님의 반응은, 그의 영원한 목적을 실행함에 있어서, 그의 피조 지능존재들의 변화하는 태도와 바뀌는 마음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외관상 그리고 피상적으로 바뀔 수 있지만; 그러나 표면의 아래 그리고 밖을 향한 모든 현시활동의 밑에는, 영원한 하느님의 변함없는 목적, 영속하는 계획이 여전히 있다.
2:2.4 (36.2)바깥 우주들에서는, 완전성은 부득이 상대적인 용어가 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중앙우주 그리고 특별히 파라다이스에서는, 완전성은 희석되지 않는다; 어떤 위상들에서는 절대이기도 하다. 삼위일체 현시활동은 신성한 완전성을 다양하게 보여주지만, 그것을 엷게 하지는 않는다.
2:2.5 (36.3)하느님의 시원적 완전성은 어떤 가정되는 정의(正義)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신성한 본성인 선천적 선(善)의 완전성에 들어 있다. 그는 최종적이고 완벽하고 완전하다. 그의 의로운 성격의 아름다움과 완전성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공간의 세계들에서 살아있는 실존들의 전체 기획이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완전성을 공유하는 체험인 높은 운명을 향해 모든 의지 창조체들을 들어 올리는 신성한 목적에 집중되어있다. 하느님은 자아-중심적이지도 않고 자아-포괄적이지도 않다; 그는 광대한 우주들의 우주의 모든 자아-의식적 창조체들에게 자신을 증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2:2.6 (36.4)하느님은 영원히 그리고 무한하게 완전하며,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는 불완전성을 몸소 알 수 없지만, 모든 파라다이스창조자 아들들의 진화 우주들에 속한 모든 투쟁하는 창조체들의 불완전함의 모든 체험에 대한 의식을 공유한다. 완전성의 하느님의 개인적이고 해방시키는 손길은 도덕적 식별의 우주 차원에 올라와 있는 모든 저들 필사창조체들의 본성을 둘러싸고 그 가슴을 감싸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고는 신성한 현존의 접촉을 통하여, 우주 아버지는 전체 우주의 모든 도덕적 존재의 진화 생애 속에서 미성숙과 불완전성과 함께하는 체험에 실재로 참여한다.
2:2.7 (36.5)인간의 한계들, 잠재적 악은 신성한 본성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악과 함께하는 필사 체험과 거기에서의 모든 사람의 관계들은 시간의 자녀들─파라다이스로부터 나오는 모든 창조자 아들에 의해 창조되어왔거나 진화되어온 도덕적 책임을 가진 창조체들─안에서의 하느님의 항상-확대하는 자아-실현의 일부분인 것이 아주 확실하다.
3. 공의(公義)와 정의(正義)
2:3.1 (36.6)하느님은 정의로우시며; 따라서 그는 공정하다. “주님은 그의 모든 방법에 있어서 정의롭다.” “‘내가 행한 모든 것 중에 원인 없이 한 것이 없다’라고 주님은 말씀한다.” “주님의 심판은 참되고 전적으로 정의롭다.” 우주 아버지의 공의(公義)는 그의 창조체들의 활동과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는데, “이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에게는 어떤 사악한 불의도 없고, 사람들을 차별하지도 않고, 어떤 선물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2:3.2 (36.7)그러한 하느님께, 그의 변치 않는 천의(天意)를 바꾸라고, 그래서 그의 현명한 자연 법칙들과 의로운 영적 명령의 작용으로 인한 마땅한 결과들을 우리가 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철없이 간청하는 것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속지 말라; 하느님은 조롱당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사람이 뿌린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릇된 행위의 결과를 거두는 공의(公義)에 있어서도, 이 신성한 공의는 항상 자비로 완화된다. 무한한 지혜는 어떤 주어진 환경에서든지 내려질 공의와 자비의 비율을 결정하는 영원한 중재자이다. 그릇된 행위와 하느님 정부에 대항하는 고의적 반역에 대한 가장 큰 형벌(실제로는 불가피한 결과)은 그 정부의 한 개별적 주체로서의 실존을 잃는 것이다. 전심에서 나온 죄의 최종적 결과는 절멸(絶滅)이다. 모든 것을 고려해 봤을 때, 그러한 죄-정체성 확인된 개별존재들은 사악한 불의를 포옹함으로 전적으로 비(非)실체가 되어 스스로를 파괴해 왔다. 그렇지만 그러한 창조체의 사실적 사라짐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운명 지어진 공의의 질서가 우주 안에서 충분하게 준수되어 있을 때까지 항상 연기된다.
2:3.3 (37.1)실존의 중지는 대개 영역 또는 영역들의 섭리시대나 신시대적 판결이 있을 때 공표된다.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는 그것은 행성의 섭리시대의 끝에 온다. 실존의 중지는 행성협의회로부터 창조자 아들의 법정을 거쳐 옛적으로 늘 계신이들의 심판법정에 이르는 모든 사법권을 갖는 법정들의 조화-협동 활동에 의하여, 그러한 시기에 공포될 수 있다. 괴멸의 명령은 그릇된 일을 행한 자가 거주하는 구체에서 비롯된 고발에 대한 파기될 수 없는 확인 이후에 초우주의 상급 법원에서 비롯한다; 그 다음에는, 소멸 판결이 높은 곳에서 확인되고 나면, 집행은 초우주의 본부에 거주하는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일하는 판사들의 직접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2:3.4 (37.2)이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인되면, 죄-정체성 확인된 존재는 즉시 그가 존재해 오지 않았던 것처럼 된다. 그러한 숙명으로부터는 부활이 전혀 없으며; 그것은 영속하며 그리고 영원하다. 정체성의 살아 있는 에너지 요소들은, 시간의 변형들과 공간의 형태변형들에 의해, 그것들이 언젠가 창발하였던 조화우주의 잠재들 속으로 분해된다. 사악하고 불의한 자의 개인성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보증할 수도 있는 선택과 최종 결정에 창조체가 실패함으로써, 지속적인 생명 매체를 빼앗긴 것이다. 연관된 마음에 의한 계속되는 죄 포옹은 사악한 불의와의 완벽한 자아-정체성확인구현 안에서 극도에 이르고, 그 다음에는 생명이 중지됨에 따라, 조화우주로 분해됨에 따라, 그렇게 고립된 개인성은 창조의 대혼(大魂) 속으로 흡수되어, 최극존재의 진화하는 체험의 일부분이 된다. 그것은 결코 다시 개인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의 정체는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된다. 조절자-내주 개인성의 경우에는, 지속되는 조절자의 실체 속에서 체험적 영 가치들은 생존한다.
2:3.5 (37.3)실체의 현재 차원들 사이의 어떤 우주 경쟁에서든지, 상급 차원의 개인성이 하급 차원의 개인성을 궁극적으로 이기게 된다. 우주 논쟁의 이 필연적 결말은 본질특성으로서의 신성이 어떤 의지 창조체이든지 실체성 또는 실재성의 정도와 동등하다는 사실에서 선천적이다. 순전한 악, 완벽한 잘못, 고의적 죄 , 그리고 수그러지지 않은 사악한 불의는 선천적으로 그리고 자동으로 자멸이다. 조화우주의 비실체인 그러한 태도들은 정의로운 판결의 우주 법정들이 공의(公義)-결정의 명령을 보류하는 과도기 자비-관용과 그리고 공정성을-찾아내는 기능구조들 때문에 오직 우주 안에서 생존할 수 있다.
2:3.6 (37.4)지역우주들에서의 창조자 아들의 통치는 창조와 영성화의 하나이다. 이들 아들들은 진보하는 필사자 상승이라는 파라다이스 계획의 효력적인 집행에, 반역자들과 그릇된 생각을 한 자들을 복귀시키는 일에 자신들을 헌신하지만, 그러한 모든 사랑 넘치는 수고들이 마침내 그리고 언제까지나 거부되면 최종 괴멸 명령이 옛적으로 늘 계신이들의 관할권 밑에서 움직이는 기세들에 의해 집행된다.
4. 신성한 자비
2:4.1 (38.1)자비는 단순히, 지식의 완전성과 유한 창조체들의 자연적 연약성과 환경의 장애를 충분히 인식하는데서 나오는 그 지혜에 의해 완화된 공의일 뿐이다. “우리 하느님은 연민이 가득하시고, 인자하시고, 오래-참으시며, 자비가 풍부하시다.” 그러므로 “주님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는 그가 충분하리만큼 용서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자비는 영속에서 영속으로 이어지며”; 정말로, “그의 자비는 언제까지나 지속된다.” “나는 이 세상에서 자애로움, 심판 그리고 정의(正義)를 베푸는 주님이며, 이는 이 모든 것들에 있어 내가 기뻐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자녀를 고의적으로 괴롭히지도 않고 슬프게 하지도 않는데, “이는 내가”자비의 아버지이고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2:4.2 (38.2)하느님은 선천적으로 친절하고, 본성적으로 연민이 가득하시며, 영속적으로 자비로우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의 사랑 넘치는-친절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영향도 결코 필요하지 않다. 창조체의 필요만으로도 아버지의 온화한 자비와 그의 구원하는 은혜의 충만한 흐름을 보장하기에 온통 충분하다. 하느님은 그의 자녀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그에게는 쉬운 일이다. 사람이 자기 이웃을 더 잘 납득할수록, 그를 용서하는 것, 나아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더욱 쉬워진다.
2:4.3 (38.3)오직 무한한 지혜의 식별력만이 정의로운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리고 동시에 어떤 주어진 우주 상황 안에서도 공의와 자비를 베풀 수 있게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의 우주 자녀들을 향해 갈등하는 태도로 결코 괴로워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결코 태도적인 적대주의의 희생자가 아니다. 하느님의 모든 것-알고계심은 그의 영원한 본성의 그의 모든 신성한 속성과 무한 본질특성의 요구들을 완전하게, 동시에, 그리고 균등하게 만족시키는 그 우주 행위성의 선택에 그의 자유의지를 틀림없이 이끈다.
2:4.4 (38.4)자비는 선(善)과 사랑의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산물이다. 사랑 넘치는 하느님의 선(善)한 본성은 그의 우주 자녀들의 모든 집단의 각 구성원에게 자비의 현명한 사명활동을 억제할 수 없도록 만든다. 영원한 공의와 신성한 자비는 인간 체험 속에서 소위 공정함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함께 구성한다.
2:4.5 (38.5)신성한 자비는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우주 차원들 사이를 조절하는 하나의 공정(公正) 기법을 나타낸다. 자비는 진화하는 유한자의 상황들에 맞추어진 최극위의 공의, 시간의 자녀들의 가장 높은 이익과 우주 복지를 만족 시키려고 수정된 영원의 정의(正義)이다. 자비는 공의(公義)에 대한 위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화하는 우주들의 물질창조체에게 그리고 종속적인 영적 존재들에게 그것이 공정하게 적용 되듯이, 최극 공의의 요구를 납득하는 해석이다. 자비는, 그것이 신성한 지혜에 의해 형성되어지고, 그리고 우주 아버지와 그의 모든 연관 창조자들의 모든 것-아는 마음과 주권을 가진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창조계에 있는 갖가지 지능존재들에게 현명하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내려지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공의(公義)이다.
5. 하느님의 사랑
2:5.1 (38.6)“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우주의 관련사들에 대한 유일한 그의 개인적 태도는 항상 신성한 애정 반응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증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는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태양을 뜨게 하시며 온당한 자와 부당한 자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신다.”
2:5.2 (39.1)자기 아들들의 희생이나 또는 그의 피조 종속들의 탄원 때문에 설득되어서,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이라고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것인데, “왜냐하면 아버지 자신이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어버이로서의 애정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주하도록 놀라운 조절자들을 보낸다. 하느님의 사랑은 보편적이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 그는 “진리의 지식을 얻어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게 하신다.” 그는 “누구도 멸망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2:5.3 (39.2)창조자들은 사람들이 신성한 법칙들을 어리석게 위반함으로써 생기는 비참한 결과로부터 구하려는 시도를 가장 먼저 하시는 이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아버지로서의 애정이다; 따라서 그는 때로 “우리가 그의 거룩함을 함께 하는 자가 되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역경에 있게 한다.” 너희가 불같은 시련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모든 고통 속에서 그가 우리와 함께 고통 받고 있음”을 기억하라.
2:5.4 (39.3)하느님은 죄인들에게 신성하게 다정하시다. 반역자들이 정의로움으로 돌아올 때 , 그들은 자비롭게 받아들여지며, “이는 우리 하느님은 풍성하게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너희 죄악들을 지워버리는 자이며, 나는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사랑의 태도를 우리에게 증여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보라.”
2:5.5 (39.4)결국,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가장 큰 증거와 그를 사랑해야 되는 최극 이유는 아버지의 내주하는 선물─너희 두 존재가 영원히 하나가 될 그때를 그토록 인내하며 기다리는 조절자─이다. 비록 너희가 하느님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만일 너희가 내주하는 영의 인도를 따르면,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애 한 생애, 우주에 우주를 거쳐서 그리고 한 시대 한 시대, 너희가 우주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개인성의 현존 앞에 마침내 서게 될 때까지, 틀림없이 인도될 것이다.
2:5.6 (39.5)인간 본성의 한계와 너희 물질적 창조체의 장애들이 너희가 그를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너희가 하느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너희와 하느님 사이에는 건너야 되는 엄청난 거리(물리적 공간)가 있다.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다리를 놓아야만 하는 영적 차이의 거대한 심연(深淵)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파라다이스 개인적 현존으로부터 너희를 물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분리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너희 안에 살고 계시다는 엄숙한 사실을 멈추어 숙고해 보라;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이미 그 심연에 다리를 놓았다. 그는 너희가 너희의 영원한 우주 생애를 추구할 때 너희 안에 살면서 너희와 함께 수고하기 위하여 그 자신, 그의 영을 보내 왔다.
2:5.7 (39.6)나는 그토록 위대하고 동시에 그의 하급 창조체들을 들어 올리는 사명활동에 그토록 애정을 담아 헌신하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이 쉽고도 기쁜 일임을 발견한다. 나는 창조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통제에서 그토록 능력이 있는데도, 선함에 그토록 완전한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드리우는 사랑함-친절함에 그토록 신실하신 분을 당연히 사랑한다. 나는 그가 그토록 위대하고 능력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선하고 자비롭다면, 똑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놀라운 속성들을 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본성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2:5.8 (39.7)공간 우주들의 진화에 선천적으로 있는 시간의 갖가지 어려움들과 그토록 용맹스럽게 투쟁하는 창조자 아들들 그리고 그들의 종속 행정-관리자들을 내가 바라볼 때, 나는 내가 우주들의 비교적 작은, 이들 통치자에게 크고 심오한 애정을 갖고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나는, 영역들의 필사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우주 아버지와 신성하거나 인간인 다른 모든 존재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 개인성들이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식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체험은 사랑을 받는 체험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응답이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의 최극위, 궁극위 그리고 절대라는 모든 속성들이 그로부터 없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를 최극으로 사랑할 것이다.
2:5.9 (40.1)아버지의 사랑은 현재와 그리고 영원한 시대의 끝없는 순환에 두루, 우리를 따라온다. 너희가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본성을 숙고할 때,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타당하고도 자연스러운 개인성 반응이 있다: 너희는 너희 조물주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되겠고; 자녀들이 이 세상의 부모에게 주는 것과 비슷한 애정을 너희가 하느님께 그렇게 드리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 실제 아버지, 진정한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우주 아버지는 그의 피조 아들들과 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복지를 언제까지나 추구하기 때문이다.
2:5.10 (40.2)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현명하고 통찰력 있는 부모의 애정이다.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지혜와 우주 아버지의 완전 본성의 다른 모든 무한 특징들과 합일된 관계적-연합 속에서 기능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하느님은 아니다. 필사 존재들에 대한 신성한 사랑의 가장 큰 현시활동은 생각 조절자들의 증여 안에서 보이지만, 그러나 너희의 아버지 사랑에 대한 가장 큰 계시는 이 땅에서 이상적인 영적 삶을 살았던 그의 미가엘아들의 증여 삶 속에서 보인다. 각각의 인간 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개별존재화하는 이는 바로 내주하는 조절자이다.
2:5.11 (40.3)사랑이라는 인간의 언어 상징을 사용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의 우주 자녀들에 대한 신성한 애정을 묘사하라고 강요된 것이 가끔 나는 상당히 고통스럽다. 이 단어는, 그것이 비록 존중과 헌신이라는 필사 관계들에 대한 사람의 최고 개념이라 하더라도, 너무 많은 인간관계를 너무 자주 나타내기 때문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체들을 향한 그의 비길 데 없는 애정을 나타내는데, 또한 사용되는 어떤 언어로 알려지기에는 온통 저급하고 전혀 맞지 않는다!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애정의 참된 본성과 절묘하게 아름다운 의의(意義)를 사람 마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몇 가지 숭고한 그리고 전용적인 단어를 내가 사용할 수 없음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2:5.12 (40.4)사람이 어떤 개인적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할 때, 하느님의 왕국은 단지 선(善)한 왕국이 되고 만다. 신성한 본성의 무한한 합일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하느님이 그의 창조체들과 가지는 모든 개인적 거래에서 지배적인 특징이다.
6. 하느님의 선함
2:6.1 (40.5)물리적 우주에서 우리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지적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식별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선함은 오직 개인적 종교 체험의 영적 세계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종교는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신앙-신뢰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심지어는 지능적이고 개인적 일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또한 도덕적임에 틀림없다; 그는 선하심에 틀림없다. 사람은 위대한 하느님은 두려워했겠지만, 그러나 사람은 오직 선하신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사랑한다. 하느님의 이 선함은 하느님의 개인성의 일부분이며, 그것에 대한 그 충만한 계시는 오직 하느님의 믿는 아들들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서만 나타난다.
2:6.2 (40.6)종교는 영 본성의 초(超)세계가 인간 세계의 근본적 필요를 인식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종교는 윤리적으로 될 수 있지만, 오직 계시 종교만이 참되게 그리고 영적으로 도덕적이 된다. 하느님이 임금으로서의 도덕으로 지배하는 신(神)이라는 옛 개념은 예수에 의해 부모-자녀 관계의 친밀한 가족으로서의 도덕인, 자애로운 손길이 미치는 차원으로 향상되었는데, 필사자의 체험에서 이것보다 더 온화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2:6.3 (41.1)“하느님의 선함의 풍부함이 잘못을 범한 사람을 뉘우침으로 인도한다. “ “모든 선한 재능과 모든 완전한 재능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 “하느님은 선하시며; 그는 사람들의 혼이 쉴 영원한 피난처이다.” “주님 하느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다. 그는 오래-참으시고 선(善)과 진리가 풍부하시다.” “주님의 선함을 맛보고 알라! 그를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다.” “주님은 인자하시고 연민이 가득하시다. 그는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그는 절망에 빠진 자를 고치시고 혼의 상처를 싸매신다. 그는 사람의 만능이신 은인이시다.”
2:6.4 (41.2)왕-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그것이 비록 높은 도덕기준을 육성하고 그리고 법을-존중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었지만, 개별 신자를 시간과 영원 안에서의 그의 지위에 있어서 불안이라는 슬픈 처지에 내버려 두었다. 후기의 히브리 선지자들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임을 선언하였다; 예수는 하느님을 각 인간 존재의 아버지로 드러냈다. 예수의 일생은 하느님에 대한 필사자 개념 전체를 초월하여 조명하고 있다. 자아없음은 부모의 사랑 속에 선천적으로 있다. 하느님은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사랑하신다. 그는 모든 우주 개인성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시다.
2:6.5 (41.3)정의(正義)는 하느님이 우주의 도덕 법칙의 근원임을 의미한다. 진리는 하느님을 계시자로, 가르치는 자로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은 애정을 주고 갈망하며,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납득하는 동료관계를 추구한다. 정의(正義)는 신성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사랑은 아버지의 태도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아없는 사랑과 모순된다는 잘못된 추측은, 신(神)의 본성에 합일성이 없을 것이라고 가정했고 그리고는 하느님의 합일성과 자유-의지성 둘 모두에 대한 철학적 공격인, 보상 교리라는 고심작으로 직접 가도록 이끌었다.
2:6.6 (41.4)그의 영이 땅에 있는 그의 자녀들 속에 거주하는, 하늘에 계신 자애로운 아버지는, 분리된 개인성─공의의 개인성 그리고 자비의 개인성─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버지의 은혜 또는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중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신성한 정의(正義)는 엄격한 인과응보의 공의(公義)로 지배되지 않는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을 초월한다.
2:6.7 (41.5)하느님은 결코 분노하거나 복수하시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지혜가 종종 그의 사랑을 억제하며 한편, 공의(公義)가 그의 거부된 자비의 조건을 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정의(正義)의 사랑이 죄를 동등하게 미워하는 것으로 전시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버지는 일관성 없는 개인성이 아니며; 신성한 합일성은 완전하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는, 하느님과 조화-협동자들의 영원한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합일성이 있다.
2:6.8 (41.6)하느님은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하신다: 그러한 말은 철학적으로는 참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초월적 개인성이며, 개인만이 다른 개인들을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다. 죄는 하나의 개인이 아니다. 하느님은 죄인이 개인성 실체(잠재적으로 영원한 실체)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반면,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이 어떤 개인적 태도도 취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죄는 영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의 공의는 단지 그것의 실존에 대해 인식할 뿐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을 구원한다; 하느님의 법이 죄를 파괴한다. 필사 마음이 내주하는 영 조절자와 스스로를 충분하게 정체성을 확인할 수도 있는 것과 똑같이, 만일 죄인이 자기 자신을 온통 죄로 최종적으로 정체성을 확인하면, 신성한 본성의 이 태도는 분명히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죄-정체성 확인된 필사자는 본성에서 온통 비(非)영적인 상태가 되며 (따라서 개인성으로 비(非)실제적이며) 결국에는, 존재의 소멸을 체험하게 된다. 비(非)실체는, 심지어는 창조체 본성의 미완성조차도, 점진적으로 실제가 되고 점점 더 영적으로 되는 우주 안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
2:6.9 (42.1)개인성의 세계와 대면할 때, 하느님은 사랑 넘치는 개인임이 발견된다; 영적 세계와 대면할 때에는, 그는 개인적 사랑이다; 종교적 체험에 있어서는 그는 둘 모두에 해당한다. 사랑은 하느님의 자발적 의지를 정체화한다. 하느님의 선함은 신성한 자유의 지성─사랑하고, 자비를 보이고, 인내를 현시하고, 용서를 베푸는 보편적 성향─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7. 신성한 진리와 아름다움
2:7.1 (42.2)모든 유한(有限) 지식과 창조체 납득은 상대적이다. 정보와 지능은, 비록 높은 근원들에서 단편적으로 수집되었더라도, 오직 상대적으로 완벽하고 부분적으로 정확하며 개인적으로 참될 뿐이다.
2:7.2 (42.3)물리적 사실들은 상당히 일정하지만, 진리는 우주의 철학에 있어서 살아있고 유연한 요소이다. 진화하는 개인성들은 그들의 교통에서 부분적으로 현명하고 상대적으로 참될 뿐이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확신할 수 있다. 한 장소에서 겉으로 보기에 온통 참된 것으로 보이는 그것이 다른 창조 구역에서는 오직 상대적으로 참된 것일 수 있다.
2:7.3 (42.4)신성한 진리, 최종 진리는 한결같고 보편적이지만, 영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다양한 구체에서 흩어져 나온 수많은 개별존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때로는 지식의 완벽성에서의 이 상대성 때문에 세부사항에서 다를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은 체험의 길이와 정도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 체험의 충만함에서 다를 수 있다. 첫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의 법칙과 뜻, 생각과 태도가 영원히, 무한히 그리고 보편적으로 참된 반면; 동시에, 각 우주, 체계, 세계와 창조된 지능존재에 대하여 이것들을 적용하고, 그리고 그들을 조절하는 것은, 무한한 영과 다른 모든 연관된 천상의 개인성들의 지역적 계획과 과정에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창조자 아들들이 그들 각자의 우주에서 기능하는 대로 그들의 계획과 기법에 일치한다.
2:7.4 (42.5)물질주의의 잘못된 과학은 필사 사람을 우주 속에 버림을 받은 것으로 판결할 것이다. 그러한 부분적인 지식은 잠재적으로 악이다; 그것은 선과 악 둘로 이루어진 지식이다. 진리는 충만하면서도 균형이 잡혀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사람이 진리를 찾을 때, 그는 신성한 실제를 추구한다.
2:7.5 (42.6)철학자들은 추상적 관념의 오류, 곧 실체의 한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실천 관행으로 잘못 인도될 때, 가장 중대한 잘못을 범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고립된 양상이 진리 전체가 되는 것으로 장담한다. 현명한 철학자는 항상 모든 우주 현상 뒤에 있는 그리고 그것보다 선재(先在)하는 창조적 설계를 찾으려 할 것이다. 창조자의 생각은 항상 창조적 행동보다 앞선다.
2:7.6 (42.7)지적 자아-의식은, 진리의 아름다움, 그것의 영적 본질특성을, 그 개념에 대한 철학적 일관성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나-계시는 진리의 영의 어김없는 반응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은 진리를 인식함으로부터 생기는데, 이는 진리가 활동으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망과 슬픔은 실수 위에서 일어나는 데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체험 속에서 실현되어질 수 없다. 신성한 진리는 그 영적 향기에 의해 가장 잘 알려진다.
2:7.7 (42.8)영원한 탐구는 통일을 위한, 신성한 결합을 위한 것이다. 멀리-퍼지는 물리적 우주는 파라다이스 섬에서 결합하며; 지적 우주는 마음의 하느님, 공동 행위자 안에서 결합하며; 영적 우주는 영원한 아들의 개인성 안에서 결합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에 속한 고립된 필사자는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와 우주 아버지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결합한다. 사람의 조절자는 하느님의 단편이고 신성한 통일을 영속적으로 추구하며; 그것은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파라다이스 신(神)과 함께 그리고 그 안에서 결합한다.
2:7.8 (43.1)최극 아름다움을 식별함은 실체의 발견과 그리고 집대성활동이다: 영원한 진리 안에 있는 신성한 선(善)을 식별함, 그것은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인간 예술의 매력조차도 그 합일성의 조화 속에 있다.
2:7.9 (43.2)히브리 종교의 큰 오류는 과학의 사실적 진리들과 예술의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하느님의 선함과 연관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 그리고 종교가 진리를 상대적으로 배제하고 아름다움을 무시하도록 하느님의 선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어리석은 길을 일관되게 추구한 이래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고립된 선(善)에 대한 추상적이고 분열된 관념으로부터 돌아서려는 경향이 점점 더 생겨났다. 많은 20-세기의 사람들의 헌신과 충성을 붙잡는데 실패한, 현대 종교의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고립적인 도덕성은, 만일 그 도덕적 명령에 추가하여 과학과 철학과 영적 체험의 진리들을, 물질 창조의 아름다움 , 지적 예술의 매력, 그리고 진정한 성격 성취라는 웅장함과 똑같이 배려한다면, 그 스스로 회복될 것이다.
2:7.10 (43.3)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은, 조화우주적 진리와 우주적 아름다움, 그리고 신성한 선(善)의 확대되고 절묘하게 집대성된 현대적 개념들에서 나오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살아있는 삶의 철학을 과감하게 구축하게 될, 그러한 영적 통찰력을 가진 선견지명이 있고 진취적으로-내다보는 남녀들을 향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의 새롭고도 정의로운 시각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그리고 인간의 혼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이 되는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진리(眞)와 아름다움(美)과 선(善)함은 신성한 실체들이며, 사람이 영적 삶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영원자의 이 최극 본질특성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점점 더 조화-협동되고 통합될 것이다.
2:7.11 (43.4)모든─물질적, 철학적, 또는 영적─진리는 아름다운 동시에 선하다. 모든─물질적 예술 또는 영적 대칭─실제적 아름다움은 참된 동시에 선하다. 모든─개인적 도덕성, 사회적 공평성, 또는 신성한 사명활동, 그 어떤 것이든지─진정한 선(善)은 똑같이 참되고 아름답다. 건강, 맑은 정신의 정기(正氣), 그리고 행복은, 인간 체험 안에서 혼합되는 것으로서의 그러한,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의 집대성활동이다. 효과를 이루는 삶의 그와 같은 차원들은 에너지 체계들, 관념 체계들, 그리고 영 체계들의 통일을 통하여 두루 나온다.
2:7.12 (43.5)진리는 응집력이 있고, 아름다움은 끌어당기며, 선(善)은 안정을 이룬다. 실제인 이들 가치들이 개인성 체험 속에서 조화-협동될 때, 그 결과는 지혜에 의해 조건이 갖추어지고 충성에 의해 분별화되는 높은 계층의 사랑이다. 모든 우주 교육의 실제적인 목적은 세계들의 고립된 자녀가 그의 확대되는 체험의 더 큰 실체들과 더 나은 조화-협동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실체는 인간 차원에서는 유한하고, 좀 더 높은 그리고 신성한 차원들에서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2:7.13 (43.5)[유버사에 있는 옛적으로 늘 계신이들의 권한에 의해 활동하는 신성한 조언자에 의해 제시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