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랜시아 책 - 제 103 편 종교적 체험의 실체

(USGNY[Urka]-KOR-000-1996-6)

유랜시아 책   

부 III: 유랜시아의 역사

제 103 편 종교적 체험의 실체    



제 103 편 종교적 체험의 실체

103:0.1 (1129.1) 사람의 참된 종교적 반응들 전체는 경배 보조자가 베푸는 초기 사명활동에 의해 지원을 받으며 또한 지혜 보조자에 의해 검열을 받는다. 사람의 첫 번째 초(超)마음 자질은 우주 창조 영의 성령 안에서 개인성 순환회로에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아들들의 증여 또는 조절자들의 우주적 증여가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에, 이 영향력은 윤리와 종교 그리고 영성에 대한 사람의 관점을 확대시키는 기능을 한다.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증여가 이루어진 뒤에는, 종교적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수용력의 확대를 위하여, 해방시키는 진리의 영이 엄청난 기여를 한다. 거주민이 사는 세계에서 진화가 진척됨에 따라, 생각 조절자들은 보다 높은 유형의 인간적 종교 통찰력 개발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게 된다. 생각 조절자는 그것을 통하여 유한한 창조체가 한계가-없는 신(神), 우주 아버지에 대한 확실성과 신성을 신앙으로-어렴풋이 볼 수 있는 조화우주 창문이다.

103:0.2 (1129.2) 인간 종족들의 종교적 경향들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들은 우주적으로 현시되고 겉으로 보기에 자연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원시적인 종교들은 그 유래에서 항상 진화적이다. 자연적인 종교 체험이 진보하기를 계속하면 그에 따라, 진리의 주기적인 계시가, 그것이 없었다면 행성 진화의 느리게-움직일, 그 과정을 마침표로 끊어준다.

103:0.3 (1129.3) 오늘날 유란시아에는 네 종류의 종교들이 있다:

103:0.4 (1129.4) 1. 자연적 또는 진화적 종교.

103:0.5 (1129.5) 2. 초자연적 또는 계시적 종교.

103:0.6 (1129.6) 3. 자연적 종교와 초자연적 종교가 다양하게 섞인, 실천적 또는 현재 종교.

103:0.7 (1129.7) 4. 철학적 종교들, 사람이 만들었거나 철학적으로 용의주도한 신학적 교리들과 이성으로 창출된 종교들.

제 1 장. 종교의 철학

103:1.1 (1129.8) 사회적 또는 인종적 집단 속에 이루어진 종교적 체험의 합일은 개별존재 속에 내주하는 하느님 단편(斷片)의 동일한 자연본성으로부터 도출된다. 다른 사람의 번영에 그의 사심-없는 관심을 사람 안에 기원시키게 하는 그것이 이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성의 독특성─어떤 두 필사자도 똑같지 않음─때문에, 어떤 두 인간 존재도 자기들 마음속에 거주하는 신성(神性)을 갖는 영의 안내와 충동을 유사하게 해석할 수 없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한 필사자들 집단이 영적인 합일을 체험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결코 철학적 획일성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종교적 생각과 체험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의 이러한 다양성은 20세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500여 가지의 서로 다른 정의들을 내세웠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실체 안에서, 각각의 인간 존재는 자기 안에 내주하는 하느님 영으로부터 발산되는 신성한 충동에 대한 자신만의 체험적 해석에 기초를 두고 종교를 정의한다. 따라서 그러한 해석은 독특할 수밖에 없고, 다른 모든 인간존재의 종교 철학과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103:1.2 (1130.1) 필사자가 동료 필사자의 종교 철학과 전적으로 동의할 때, 그러한 현상은 이 두 존재들이 철학적인 종교적 해석에 대한 자신들의 유사성과 관계된 문제들에 접하는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103:1.3 (1130.2) 너희의 종교가 개인적인 체험의 문제인 반면, 너희가 너희 종교적 삶을 자기중심적인─한정되어지고 이기적이며 반(反)사회적인─상태가 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그 목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른 종교적 체험들(다른 다양한 필사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의 지식에 자신을 노출시켜야만 한다.

103:1.4 (1130.3) 종교가 처음에는 어떤 원시적인 믿음이고, 다음에 그에 대한 어떤 가치들에 대한 추구가 뒤따라 오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합리주의는 오류를 범한다. 종교는 시원적으로 가치들에 대한 추구이며, 그 다음에 해석적인 믿음들에 대한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사람들은 믿음들─해석들─에 대해서보다는 종교적인 가치들─목표들─에 대해서 동의하기가 훨씬 쉽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하여 종교가 수백 가지의 모순되는 믿음들─신조들─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혼란된 형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가치들과 목표들에 대하여 동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이것은 일정한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들 대부분을 포기하거나 변화시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종교는 종교적 신념들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한다. 신학은 종교를 산출하지 못한다; 신학적인 철학을 낳는 것은 종교이다.

103:1.5 (1130.4) 종교가 가치들에 대한 이해 위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의 신앙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에, 종교인들이 잘못된 것을 너무 깊이 믿어왔다는 것으로 종교가 무효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는 체험과 종교적 생각 위에 기초를 둔다; 즉 종교의 철학인 신학은 그 체험을 해석하기 위한 정직한 시도이다. 그러한 해석에서 비롯된 신념들은 옳을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으며, 또는 진리와 실수의 혼합일 수도 있다.

103:1.6 (1130.5) 영적 가치들의 실현과 인지는 하나의 체험이며 그 체험은 초(超)관념적이다. 하느님-의식함으로 부르기로 우리가 작정한 이 “감각”, “느낌”, “직관”, 또는 “체험”을 정의하는 데 채택할 수 있는 단어는, 그 어떤 인간 언어에도 없다. 사람 속에 거주하는 하느님의 영은 개인성 존재가 아니지만─조절자는 전(前)개인적 존재이다─이 는 가치를 제시하고, 신성(神性)의 향기를 발산하며, 가장 높고 무한한 감각에서 개인적이다. 만약에 하느님이 적어도 개인적이 아니라면, 그는 의식할 수 없으며, 그리고 의식이 없다면, 그러면 인간이하일 것이다.

제 2 장. 종교와 개별존재

103:2.1 (1130.6) 종교는 인간 마음속에서 기능을 발휘하며 인간 의식 속에 나타나기 전에 체험 속에서 실현되어 왔다. 어린아이는 출생을 체험하기에 앞서서 약 9개월 전부터 실존되었다. 그러나 종교의 “탄생”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단계적인 창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출생일”이 존재하게 된다. 너희는 만일 “다시 태어나지”─영으로 태어나지─않으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영적인 출생들 대부분은 영의 심한 고뇌를 수반하며 심리적 혼란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육체적인 출생들 대부분이 “격렬한 산통”과 “분만”에 있어서의 다른 비정상적 상황들로 특징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다른 영적 출생들은, 비록 그 어떤 종교적인 발전도 의식적인 노력과 적극적이고 개별적인 결심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영적 체험의 증진으로 있는 최극 가치들에 대한 인지에서의 하나의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성장이다, 종교는 결코 소극적인 체험,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다. “종교의 탄생”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일반적으로 정신적 갈등, 감정적 억압, 그리고 기분적인 동요의 결과로서 일생에서 후기에 발생되는 종교적 에피소드들을 특징짓는 소위 변환 체험이라 불리는 그러한 사건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

103:2.2 (1131.1) 그러나 하늘에 계신 사랑 넘치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의식(意識) 속에서 자라날 만큼 자신들의 부모들에 의해 그렇게 보살펴진 그러한 개인들은, 정신적 고비, 정서적 격변을 통해서만 하느님과의 동료관계에 대하여 그러한 의식을 달성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동료 필사자들을 흘겨보아서는 안 된다.

103:2.3 (1131.2) 계시된 종교의 씨가 싹트는, 사람 마음속에 있는 진화의 토양은 매우 일찍부터 사회의식을 기원시킨 도덕적 본성이다. 어린이의 도덕적 본성에 있어서 최초의 자극은 성욕이나 죄의식 또는 개인적인 자부심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의와 공정성 그리고 친절함을 향한 충동─어떤 사람의 이웃들에 대해 도움이 되는 사명활동─과 관련된다. 그리고 그러한 초기의 도덕적 각성이 성숙될 때, 모순과 격변 그리고 위기들로부터 비교적 속박을 받지 않는 종교적 삶의 단계적 발달이 발생한다.

103:2.4 (1131.3) 모든 인간 존재는 자신의 자아-탐구와 이타적 충동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갈등을 매우 일찍부터 체험하며, 그리고 많은 경우 하느님-의식의 첫 체험은 그러한 도덕적 갈등들을 해결하는 과업에서 초인간적인 도움을 추구하는 결과로서 얻어질 수 있다.

103:2.5 (1131.4) 어린이의 심리 상태는 본능적으로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이다. 수많은 필사자들이 부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긍정적이라고 말해질 때, 그의 도덕적 충동을 언급하는 것이며 그렇게 마음의 힘이 창발하는 것은 그에게 생각 조절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103:2.6 (1131.5) 잘못된 가르침이 없으면, 정상적인 어린이의 마음은, 종교적인 의식의 창발에 따라, 도덕적인 정의와 사회적인 사명활동을 향하여, 부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죄와 범죄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긍정적으로 움직인다. 종교 체험의 발달 과정에 있어서 갈등은 생길 수도 있고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필연적인 결정과 수고 그리고 인간 의지의 기능은 반드시 따라온다.

103:2.7 (1131.6) 도덕적인 선택은 대개 다소간의 도덕적인 갈등을 동반한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바로 이러한 최초의 갈등은 이기주의의 강한 충동과 이타주의의 자극 사이에 존재한다. 생각 조절자는 자기본위적인 동기를 갖는 개인성 가치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표와 하늘의 왕국의 기쁨으로 인도하는 것으로서 이타적인 충동을 조금 더 높게 인정한다.

103:2.8 (1131.7) 도덕적 존재가 이기적으로 되려는 충동에 직면하여 사심-없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하였을 때, 그것은 원시적인 종교적 체험이다. 어떤 동물도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런 결정은 인간적이며 또한 종교적이다. 그것은 하느님-의식함의 사실을 포옹하며 사회적인 봉사의 충동, 사람이 형제신분을 이루는 기초를 보여준다. 마음이 자유의지의 행동에 의해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선택하였을 때, 그러한 결정이 종교 체험을 구성한다.

103:2.9 (1131.8) 그러나 어린이가 도덕적인 역량을 충분하게 습득하도록 발달되어 이타적인 봉사를 선택할 수 있게 되기 전에, 그에게는 이미 하나의 강력하고도 잘 통합된 이기주의적 본성이 개발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적 상황이 “높은” 본성과 “낮은” 본성 사이, “죄를 지닌 옛 사람”과 은혜의 “새로운 본성” 사이에 투쟁이 있다는 이론을 일으키게 한다. 정상적인 어린이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욱 복되다”는 것을 삶 속에서 매우 일찍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103:2.10 (1131.9) 사람은 자아-봉사하려는 충동을, 자기─자신으로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는 자신의 의리를, 자기 자신의 밖으로부터의 어떤 영향력─하느님─으로 이타적이 되도록,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기울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정말로 사실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이타적 욕구들은 내주 하는 생각 조절자의 인도에서 실재적으로 기원되고, 이 조절자는 하느님의 단편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 감시자의 충동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이타적이 되려는, 동료-창조체를 염두에 두는, 그러한 충동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것은 어린이의 마음이 겪는 초기의 근본적인 체험이다. 자라나는 어린이가 개인성 통일을 이루지 못할 때, 이타적인 충동은 자아의 복지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만큼 과도하게 발전될 수도 있다. 잘못 인도된 양심은 많은 갈등과 염려와 슬픔 그리고 끝없는 인간적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제 3 장. 종교와 인종

103:3.1 (1132.1) 영과 꿈 그리고 다양한 다른 미신들에 대한 믿음이 모두 원시적인 종교들의 진화적인 기원 속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반면, 너희는 씨족 또는 부족이 가진 단결의 영이 끼치는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집단적인 관계 속에는 초기 인간 마음의 도덕적인 본성 속에 있는 자기본위적-이타적 갈등에 도전을 주는, 엄격한 사회적 상황이 존재하였다. 영들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원시적인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종교를 씨족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 때가 이르면, 그러한 종교들은 개인성구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처음에는 동물들로, 그리고 나중에는 어떤 초인간으로 또는 하느님으로 된다. 토템적인 믿음도 갖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부시맨 같은 열등한 종족들도 자아-이익과 집단-이익 사이의 차이, 세속적인 가치들과 신성한 가치들 사이의 기초적인 차이를 인식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집단은 종교 체험의 근원이 아니다. 사람의 초기 종교에 대한 이러한 모든 원시적 공헌들의 영향에 상관없이, 참된 종교적 충동은, 의지로 하여금 사심-없는 상태가 되도록 활성화시키는 순전한 영 현존들 속에 그 기원을 가진다는 것이 여전히 사실로 남아있다.

103:3.2 (1132.2) 후대의 종교는 자연적인 경이로움과 기적들, 미(未)개인적 초자연성에 대한 원시적인 믿음 안에서 예시된다. 그러나 진화하는 종교는, 개별존재가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의 유익을 위하여 어떤 개인적인 희생을 해야만 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보다 행복하고, 보다 낫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고 곧 요구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종교는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봉사가 되도록 되어 있다.

103:3.3 (1132.3) 종교는 사람의 환경을 변경시키도록 계획되어 있지만, 오늘날 필사자들 속에서 발견되는 그 종교의 대부분은 이것을 행하는 데에서 어떤 도움도 없는 것이 되어왔다. 환경이 너무나도 자주 종교를 지배해 왔다.

103:3.4 (1132.4) 모든 시대들의 종교 속에서 탁월하다고 인정되는 체험은, 신학적 독단론이나 혹은 철학적 이론에 관한 사고(思考)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들과 사회적 의미들에 관한 느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술의 요소가 도덕의 개념에 의해 대체되면서 그에 따라 종교는 순조롭게 진화한다.

103:3.5 (1132.5) 사람은 신비의 힘, 마술, 자연 경배, 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동물 경배의 미신들을 통하여 다양한 예식으로 진화하였는데, 개별존재의 종교적 태도는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그 씨족의 집단적 반응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예식들은 부족 신앙들로 초점화구현 되고 형태화 되었으며, 결국에는 이 두려움들과 신앙들이 하느님들로 개인성구현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종교적 진화들 속에는 도덕적인 요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 속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충동은 항상 효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영향력─하나는 인간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성한─은 시대들의 변화 속에서 종교가 살아남도록 보장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수많은 파괴적 경향들과 악의적인 반목에 의해서 너무나도 자주 사멸될 위기에 처했다.

제 4 장. 영적 교제

103:4.1 (1133.1) 사회적 행사와 종교적 모임의 특징적인 차이점은, 종교적인 것이 세속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교제의 분위기에 의해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적 관계적-연합은 이러한 방법으로 신성한 것과 친교를 나누는 느낌을 창출하며, 이것이 집단적 경배의 시발점이다. 공동 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적 교제에 있어서 가장 초기적인 유형이었으며, 그래서 초기의 종교들은 예식으로 바친 희생 제물의 일부분을 그 예식에 참여한 자들이 반드시 먹도록 제공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주님의 만찬이 이러한 교제 형태를 내포하고 있다. 그 교제의 분위기는 자아를-탐구하는 자기와 내주 하는 영 감시자의 이타적 충동과의 갈등에 있어서 산뜻하고도 위안이 되는 휴식기간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경배─사람의 형제신분의 창발로 결국 생겨난 하느님 현존의 실천 관행─의 전주곡이다.

103:4.2 (1133.2) 원시인이 자신의 하느님과의 교제가 이미 단절되었음을 느낄 때, 그는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다정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어떤 종류의 희생제물을 제공하는 방법에 의지하였다. 정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진리를 발견하도록 인도하였으며, 진리가 이상을 증강시켰고, 이것이 개별 종교인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안겨주었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이상들은 등비수열로 성장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그것들에 맞추어 생활하는 우리의 능력은 오직 등차수열로 증강되기 때문이다.

103:4.3 (1133.3) 죄의식(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은 영적 교제의 단절로부터 올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의 도덕적인 타락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그러한 궁지로부터의 탈출은 오직 어떤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이상들이 반드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에 대한 실현을 통하여 두루 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의 가장 높은 이상들에 맞추어 살 수는 없지만, 하느님을 발견하려는 자신의 목적에 충실할 수 있고 점점 더 그를 닮아갈 수 있다.

103:4.4 (1133.4) 예수는 희생 제물과 죄 값에 대한 모든 예식들을 제거하셨다. 그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선언함으로써 즉: 창조체-창조자 관계를 자녀-부모 기초 위에 놓음으로써 이러한 모든 허구적인 죄의식의 근본과 우주에서의 고독감을 파괴하셨다. 하느님은 자신의 필사자 아들들과 딸들에게 사랑 넘치는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한 긴밀한 가족 관계에 맞지 않는 모든 예식들은 언제까지나 폐기되었다.

103:4.5 (1133.5) 아버지 하느님은 실재적 덕목이나 가치성의 기초 위에서가 아니라, 그 자녀의 동기─창조체의 목적과 의도─를 인식하여 사람을 자기 자녀로서 다룬다. 그 관계는 부모-자녀 관계적-연합의 하나이며 신성한 사랑에 의해 활성화된다.

제 5 장. 이상의 기원

103:5.1 (1133.6) 주로 감정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유래되는 도덕적 책무와 사회적 의무에 대한 감각은 초기의 진화적인 마음에 의해서 기원된다. 더 많은 사회적 봉사의 긍정적인 충동과 이타주의의 이상주의가 인간 마음속에 내주 하는 신성한 영의 직접적인 충동으로부터 도출된다.

103:5.2 (1133.7)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자신의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어떤 것을 부인하려는 충동─의 관념-이상은 처음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원시인은 자신에게 매우 가까운 자들, 자신에게 친절한 자들만을 이웃으로 간주한다; 종교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어떤 사람의 이웃은 씨족, 부족, 국가를 포옹하는 개념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는 인간성 전체, 심지어는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도 사랑해야 하는 정도까지 포옹하도록 이웃에 대한 범위를 확대시키셨다. 그리고 모든 정상적인 인간 존재들 속에는 이 가르침이 도덕이라고─옳다고─그에게 말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이러한 이상을 거의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것이 이론적으로는 옳다고 시인한다.

103:5.3 (1134.1) 모든 인간들은 이타적이고 사심-없이 되고자하는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적 충동을 인지한다. 인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충동의 기원이 물질적인 마음의 자연적인 작용이라고 설명한다; 종교인들은 필사자 마음의 정말로 사심-없는 충동이 생각 조절자라는 내부의 영의 인도에 반응하는 것임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한다.

103:5.4 (1134.2) 그러나 자기-의지와 자아가-아닌-다른-의지 사이의 이들 초기 갈등들에서의 사람의 해석은, 항상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잘 통합된 개인성만이, 싹트기 시작한 사회의식과 자기 열망에 대한 여러 형태의 다툼을 중재할 수 있다. 자아는 자신의 이웃과 마찬가지의 권리를 갖고 있다. 어느 쪽도 개별존재의 관심과 봉사를 배타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인간 죄의식에서의 가장 초기 유형에 기원을 준다.

103:5.5 (1134.3) 인간의 행복은 자아의 자기 욕망과 보다 높은 자아(신성한 영)의 이타적 충동이 집대성하고 감독하는 개인성의 통합된 의지에 의해서 조화-협동되고 화해될 때에만 성취된다. 진화적인 사람의 마음은, 영적 통찰력─진정한 종교적 반영 작용─에 입각한 사심-없는 충동의 도덕적 성장과 감정적 충동들의 자연적인 확대 사이의 싸움을 중재하는 복잡한 문제에 항상 봉착해 있다.

103:5.6 (1134.4) 자아를 위한 그리고 수많은 다른 자아들을 위한 균등한 유익을 보장하려는 시도는, 시간-공간 틀 안에서는 항상 만족스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한다. 영원한 생명을 가정한다면 그러한 반목들이 해결될 수 있지만, 한 번의 짧은 삶 속에서는 그들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예수는 그러한 모순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잃게 될 것이지만, 왕국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찾게 될 것이다.”

103:5.7 (1134.5)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하느님과-같음이 되고자 애쓰는 것은─죽음 이전과 이후로 계속 이어지는 노력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근본적인 면에서 볼 때 필사자 실존의 상태와 어떤 차이도 없다. 이 일생 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것들은 미래 일생의 증진에 직접 기여한다. 실제 종교는, 자연적 죽음의 관문을 거쳐 통과한 결과로서 사람에게 증여되는 고귀한 성격에서의 모든 미덕을 가지리라는 헛된 희망을 북돋음으로서 일어나는 도덕적 태만과 영적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가 일생을 빌려 사는 동안 진보하려고 하는, 사람의 노력들을 얕잡아보지 않는다. 모든 필사자의 소득은 불멸적 생존 체험에서 첫 단계들을 강화하는 데에 직접 기여하는 것이다.

103:5.8 (1134.6) 인간의 모든 이타적 충동들이 단지 자신의 자연적인 집단 본능에 불과하다고 배웠을 때 그것은 인간의 이상주의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자신의 혼의 이러한 보다 높은 충동들이 자신의 필사자 마음속에 내주 하는 영적 세력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배울 때 그는 고상하게 되고 크게 기세를 얻는다.

103:5.9 (1134.7) 인간은 영원하고 신성한 어떤 존재가 자기 속에 살면서 애쓰고 있음을 일단 충만하게 깨닫게 되면, 그것이 사람을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을 너머서 멀리 높이 들어 올려주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상들이 초인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살아있는 신앙이, 우리들이 하느님의 아들들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유효하게 하고, 우리의 이타적인 신념들,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느낌을 현실로 만든다.

103:5.10 (1134.8) 사람은, 그 자신의 영적 권역 안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비록 죽음이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능이신 하느님의 위대하고 준엄한 통치권 밑에서 힘도 없이 어떤 도움도 없는 노예가 아니며 더구나 기계론자의 조화우주 결정론의 어떤 도움도 없는 숙명의 희생자도 아니다. 사람은 최고의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운명의 고안건축가이다.

103:5.11 (1135.1) 그러나 인간은 압력에 의해서 구원되거나 고귀하게 되지 않는다. 영의 성장은 진화하는 혼속으로부터 솟아난다. 압력은 개인성을 일그러지게 만들지 모르지만, 결코 성장을 도모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교육적인 압력도 오직 부정적인 유익을 줄 수 있을 뿐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비참한 체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영적인 성장은 모든 외부적 압력들이 최소화 될 때 극대화된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 해방이 있다.” 인간은 가정과 공동체와 교회 그리고 국가의 압력이 최소화 될 때 최고로 발달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적 공동체에서 가정, 사회 기관, 교회 그리고 국가가 나설 자리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103:5.12 (1135.2) 사회의 종교 집단에 속한 한 구성원이 그러한 집단의 요구들에 순응할 때, 그는 종교적 신념으로 이루어진 진리들과 종교 체험으로 이루어진 사실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충만하게 표현함에 있어서 종교적인 해방을 누릴 수 있도록 장려되어야만 한다. 종교 집단의 안전은 신학적인 획일성이 아니라 영적인 합일에 달려있다. 종교 집단은 “자유사상가”가 되지 않고도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만 한다. 어떤 교회든지 살아 계신 하느님께 경배하고, 사람의 형제신분을 정당화하며, 그 구성원들로부터 교리로 인한 모든 압력을 과감하게 제거할 때 위대한 희망이 거기에 존재한다.

제 6 장. 철학적 조화-협동

103:6.1 (1135.3) 신학은 인간 영의 행동과 반응에 대한 연구이다; 결코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그 개인적 표현에서는 심리학과, 체계적인 묘사에서는 철학과 어느 정도 병합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신학은 항상 너의 종교에 대한 연구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이다.

103:6.2 (1135.4) 인간이 외부로부터 그의 우주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에 접근할 때, 그는 다양한 물리 과학을 만들어낸다; 그가 자기 자신과 우주에 대한 연구를 내부로부터 접근할 때, 그는 신학과 형이상학을 창출하게 된다. 사물과 존재로 이루어진 우주에 접근하는 이러한 두 가지의 정반대되는 큰길에서의 발견과 가르침 사이에서 맨 처음에 나타나도록 예정된 많은 불일치들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철학이라는 후일의 기법이 발달한다.

103:6.3 (1135.5) 종교는 영적인 관점, 인간 체험의 내면성에서의 깨달음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의 영적 본성은 우주의 밖을 안으로 돌려놓는 기회를 그에게 잘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개인성 체험의 내면성으로부터 배타적으로 바라볼 때에는 모든 창조가 자연본성에서 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참말이다.

103:6.4 (1135.6) 인간이 자신의 연관된 마음 인식과 물리적 감각들로 이루어진 물질적 자질들을 통하여 우주를 분석적으로 검열할 때, 조화우주는 기계적이고 에너지-물질로 보인다. 실체를 연구하는 그러한 기법은 우주의 안을 바깥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103:6.5 (1135.7) 우주에 대한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철학 개념은 물질주의 또는 영성주의의 가설 위에 세워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사고(思考) 체계들은, 우주적으로 적용될 때, 왜곡된 상태로 조화우주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전자는 안에서 밖으로 돌려놓은 우주와 접촉하고, 후자는 밖에서 안으로 돌려진 우주의 자연본성을 파악한다. 그래서 과학이든 종교든 독립된 상태에서 그 자체로는 그리고 그 스스로는 인간의 철학과 신성한 계시의 조명의 인도함 없이 우주적 진리들과 관계들에 대한 적절한 납득을 얻을 수가 결코 없다.

103:6.6 (1136.1) 인간의 내부 영은 그것의 표현과 자아-실현을 위하여 항상 마음의 심리 작용과 기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실체에 대한 인간의 외부적 체험은 체험하는 개인성의 마음의식에 입각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과 물질적인 체험, 내부적인 체험과 외부적인 체험은 항상 마음 기능과 상관관계되며, 그들의 의식적 실현에 따라 그렇게 마음 활동에 조건을 받는다.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서 물질을 체험한다; 혼(魂) 안에서 영적인 실체를 체험하지만 이러한 체험은 그의 마음속에서 인식하게 된다. 지성은 인간 체험 전체를 조화시키는 것이고 항상-제시되어 있는 조정 장치이며 본질특성권한을 부여하는 존재이다. 에너지-물체들과 영 가치들 두 가지는 모두 의식이라는 마음 매개자를 통한 해석에 의해서 채색된다.

103:6.7 (1136.2) 과학과 종교 사이의 보다 조화된 조화-협동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너희가 겪는 어려움은 물질들과 존재들의 모론시아 세계에 개재하는 권역에 대한 너희의 철저한 무지에서 기인된다. 지역우주는 실체 현시활동에 있어서 세 가지의 정도 또는 단계들 즉: 물질과 모론시아 그리고 영으로 되어 있다. 모론시아적 견지의 접근은 물질적인 과학의 발견과 종교 마음의 활동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를 없앤다. 이성은 학문의 납득 기법이다; 신앙은 종교의 통찰 기법이다; 모타는 모론시아 차원의 기법이다. 모타는 불충분한 성장을 보정하기 시작하는 초물질적 실체 감수성인데, 그것의 실체인 지식-이성과 그것의 본질인 신앙-통찰력을 위해 소유한다. 모타는 물질적인 개인성들에 의해 달성될 수 없는 다른 실체 인식에 대한 초(超)철학적 화해이다; 부분적으로는 육신의 물질적 생명으로 살아남는 체험에 입각한다. 그러나 많은 인간들은 과학과 종교의 폭넓게 분리된 권역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조화시키는 어떤 방법을 갖는 바람직한 상태를 알고 있다; 형이상학은 잘 이해된 이러한 틈을 연결시키려는 인간의 무익한 시도의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이상학은 계몽보다는 더 많은 혼란을 체험해 왔다. 형이상학은 인간이 선의(善意)로 하였음을 나타내지만 모론시아의 모타의 부재(不在)를 보상하려는 무익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103:6.8 (1136.3) 형이상학은 실패를 증명해 왔으며; 인간은 모타를 감지할 수 없다. 계시는 물질세계 안에 있는 모타의 진리에 대한 민감성의 부재를 보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법이다. 계시는 진화적인 구체에서 이성에 의해 발달된 형이상학의 혼란을 엄중하게 규명한다.

103:6.9 (1136.4) 과학은 인간이 자신의 물리적인 환경, 에너지-물질세계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다; 종교는 영적인 가치들로 구성된 조화우주에 대한 인간의 체험이다; 철학은 폭넓게 분리된 이러한 개념들이 발견한 것들을, 조화우주를 향한 정당하면서도 조화된 태도와 같은 어떤 것이 되도록 조직하고 상관관계 시키려는 인간 마음의 노력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계시에 의해서 규명되는 철학은 모타가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모타─형이상학─를 대신하는 인간의 이성의 좌절과 실패라는 현존 속에서 만족스럽게 활동한다.

103:6.10 (1136.5) 초기의 인간은 에너지 차원과 영의 차원을 구분하지 않았다. 의지적인 것으로부터 수학적인 것을 분리시키려고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보라색 인종과 그들의 안드-사람 후손들이었다. 문명화된 인간은 무생물과 생물 사이를 구분시킨 초기 그리스인들과 수메르인 들의 발자취를 점점 더 많이 따라갔다. 그리고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 철학은 영 개념과 에너지 개념 사이의 계속 넓어지는 하구(河口)에 다리를 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시간에 있어서 이러한 차이들은 최극자 안에서 일치된다.

103:6.11 (1137.1) 상상력과 추측이 과학의 영역의 확장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과학은 언제나 이성에 기초를 두어야만 한다. 이성이 안정시키는 영향력이며 도움을 주는 시녀(侍女)임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언제까지나 신앙에 의존한다. 그리고 자연 세계와 영적인 세계에서의 둘 모두의 현상을 잘못되게 해석한 것, 그렇게 그릇되게 과학과 종교라 불리는 것들이 항상 있어왔고 또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

103:6.12 (1137.2) 과학에 대한 인간의 미완성 파악과 종교에 대한 연약한 이해력 그리고 형이상학에 대한 미성숙한 시도들로부터, 그는 철학이라는 자신의 공식들을 형성해 보려고 시도해 왔다. 그리고 현대인은 물질과 영 사이를 연결하는 자신의 가장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형이상학적 관계를 결렬시키지만 않았다면,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모론시아 만(灣)에 다리를 놓으려는 형이상학의 실패가 없었다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우주에 대한 훌륭하고도 매력 있는 철학을 세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필사 사람은 모론시아 마음과 물질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 계시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철학을 조성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우주 안에 있는 자신의 확실하고 안정된 장소에 대한 만족스러운 납득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그토록 다급하게 필요한 개념적 자료에 있어서의 이러한 결핍을 보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법이다.

103:6.13 (1137.3) 계시는 모론시아 만에 다리를 놓는 진화적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다. 모타의 도움을 받지 않는 신앙과 이성은 하나의 논리적인 우주를 상상할 수 없고 그려볼 수 없다. 모타의 통찰력이 없으면, 필사 사람은 물질적인 세계의 현상들 속에서 선과 사랑 그리고 진리를 식별할 수 없다.

103:6.14 (1137.4) 인간의 철학이 물질세계를 향하여 과도하게 기울어질 때, 그것은 합리주의적 또는 자연주의적 상태가 된다. 철학이 두드러지게 영적인 차원으로 기울어질 때, 그것은 이상주의적 또는 심지어 신비적 상태가 된다. 철학이 형이상학에 기댈 정도의 불행한 사태가 되면 그것은 반드시 회의론적인, 혼란된 상태가 된다. 지나간 시대들에 있어서 대부분의 인간의 지식과 지적 평가들은 이러한 세 가지의 왜곡된 인식에 빠져들었다. 철학은 그러한 실체에 대한 해석을 논리의 직선 모양으로 무작정 내비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실체의 타원형 대칭성과, 그리고 모든 관계 개념의 본질적 곡률(曲率)로서 다루는 데에서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

103:6.15 (1137.5) 필사 사람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철학은 과학의 이성과 종교의 신앙 그리고 계시에 의해서 제공되는 진리 통찰 위에 논리적으로 기초를 두어야만 한다. 인간은 충분한 형이상학을 발전시키지 못한 자신의 실패와 모론시아의 모타를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위하여 이러한 연합에 의해 어느 정도 보상을 이룩할 수 있다.

제 7 장. 과학과 종교

103:7.1 (1137.6) 과학은 이성에 의해 지속되고, 종교는 신앙에 의해 지속된다. 신앙은, 이성에 입각하지는 않더라도 이성적이다; 논리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논리에 의해 촉진된다. 신앙은 이상적인 철학에 의해서조차도 조성될 수 없으며; 그것은 정말로 과학과 함께 그러한 철학의 바로 그 근원이다.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인 신앙은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분명하게 지시를 받는데, 영이신 하느님의 영적인 조절자 현존과 함께 오직 개인적인 인간 체험에 의해서만 분명하게 증진될 수 있다.

103:7.2 (1137.7) 참된 구원은 필사자 마음을 사물 정체화구현에서 부터 모론시아 연락의 영역을 통과하여 영적인 상관관계의 높은 우주 지위에 이르게 하는 신성한 진화의 기법이다. 그리고 물질적인 직관적 본능이 이 세상의 진화 속에서 도리에 맞는 지식의 출현보다 앞서는 것처럼, 영적인 직관적 통찰의 현시활동이 천상(天上)의 진화에 대한 숭고한 계획, 일시적 존재인 인간의 잠재를 변환시켜서 파라다이스의 최종자인 영원한 인간의 실재성과 신성을 이룩하는 일에 있어서 나중에 나타나는 모론시아 그리고 영의 이성과 체험의 전조(前兆)가 된다.

103:7.3 (1138.1) 그러나 상승하는 사람이 하느님 체험을 위하여 안쪽으로 그리고 파라다이스 쪽으로 도달함에 따라, 마찬가지로 그는 물질적 조화우주를 납득하는 하나의 에너지를 위하여 바깥쪽으로 그리고 공간 쪽으로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사람의 세속적 일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의 우주와 초우주 상승 체험은, 에너지 변질과 물질 변환의 연구와 그 어떤 작은 차이도 없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영이지만, 신(神)은 합일이며, 신(神)의 합일은 우주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영적 가치들을 포옹할 뿐만 아니라 우주통제자와 파라다이스 섬의 에너지 사실들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우주 실체의 이들 두 현상은 공동 행위자의 마음 관계들안에서 완전하게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리고 최극존재의 창발하는 신(神) 안에 있는 유한 차원 위에서 통합된다.

103:7.4 (1138.2) 체험적 철학의 중재에 의한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의 연합은 인간의 긴 파라다이스-상승 체험의 일부이다. 수학의 추정과 통찰력의 확실성은 최극자의 최대 달성에 약간 못 미치는 모든 체험 차원 위에서 항상, 마음 논리적 속성의 조화하는 기능을 요구할 것이다.

103:7.5 (1138.3) 그러나 논리는 과학의 발견들과 종교의 통찰들을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 개인성의 과학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 둘 모두가 진리의 지배를 받지 못한다면, 도달할 수도 있는 결론에 상관없이, 진리가 인도할 수 있는 어느 곳이나 따라가기를 진지하게 바라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103:7.6 (1138.4) 논리는 철학의 기법, 그것의 표현 방법이다. 참된 과학의 권역 안에서, 이성은 진실한 논리에 항상 복종할 수 있다; 참된 종교의 권역 안에서, 신앙은 내부 관점의 바탕에서 볼 때 항상 논리적이며, 설사 그러한 신앙이 과학적 접근에서 안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볼 때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논리적이다. 외부로부터 안을 들여다보면, 우주는 물질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안에서 밖으로 보면, 동일한 그 우주는 온통 영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성은 물질적인 깨달음으로부터 자라나고 신앙은 영적인 깨달음으로부터 자라나지만, 논리는 계시에 의해 강화된 철학의 중재를 통하여 안쪽으로의 관점과 바깥쪽으로의 관점 둘 모두를 확립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과학과 종교의 안정에 효력을 미친다. 그래서 철학의 논리와 평범하게 접촉함을 통하여 과학과 종교는 서로에 대하여 점점 더 관대하게 되고 회의(懷疑)가 점점 줄어든다.

103:7.7 (1138.5) 발달하는 과학과 종교 둘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탐색과 담대한 자아-비판, 진화 지위에 있어서의 미완성에 대한 더 많은 깨달음이다. 과학과 종교의 스승들은 양쪽 모두 흔히 너무나도 자아-확신적이고 독단적이다. 과학과 종교는 오직 그들이 지닌 사실들에 대해서만 자아-비판적이 될 수 있다. 사실들의 무대에서 떠나는 순간, 이성은 물러나든지 아니면 거짓 논리 속으로 급속도로 퇴화한다.

103:7.8 (1138.6) 진리─조화우주 관계들, 우주 사실들, 그리고 영적인 가치들에 대한 납득─은 진리의 영의 사명활동을 통하여 가장 잘 소유될 수 있으며 계시에 의해서 가장 잘 비판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과학과 종교 중 어떤 것도 창출하지 않는다; 계시의 기능은 과학과 종교를 실체에 대한 진리로 조화-협동시키는 것이다. 계시가 없을 때 또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파악하지 못할 때에는, 필사 사람은, 항상, 형이상학에 대한 자신의 쓸데없는 몸짓에 호소하는데, 그것은 진리의 계시 또는 모론시아 개인성의 모타에 대한 유일한 인간적 대용품이다.

103:7.9 (1139.1) 물질적 세계의 과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환경을 통제하고 어느 정도는 지배할 수 있게 한다. 영적인 체험의 종교는, 과학 시대의 문명의 복잡성 속에서 인간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형제우애관계 충동의 근원이다. 형이상학이, 그리고 보다 확실하게는 계시가, 과학과 종교의 발견들을 위한 일반적인 접합 토대를 제공하며, 인간적인 노력으로 하여금 이러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생각 권역이 과학적인 안정성과 종교적인 확실성의 잘 균형 잡힌 철학에 이르도록 논리적으로 관련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103:7.10 (1139.2) 필사자 상태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절대적으로 증명될 수 없으며; 과학과 종교 모두 가정들 위에 입각한다. 모론시아 차원에서는, 과학과 종교의 가정들이 모타 논리에 의해 부분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최고의 지위인 영적 차원에서는, 실체에 대한 그리고 실체와의 실재적 체험 앞에서 제한적인 증명의 필요성이 점차 사라지지만; 그럴지라도 거기에는 증명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유한적 상태를 크게 뛰어넘는 것들이 존재한다.

103:7.11 (1139.3) 인간 생각의 모든 분야들은, 사람의 마음 자질이 갖는 구조적 실체 감수성에 의해,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여지는 어떤 가정들에 입각한다. 과학은 세 가지 즉: 물질과 동작과 생명에 대한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추론 활동의 그 자랑스러운 생애를 시작한다. 종교는 세 가지 즉: 마음과 영 그리고 우주─최극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가정에서 출발한다.

103:7.12 (1139.4) 과학은 공간 속에서 시간의 에너지와 물질을 다루는, 수학의 생각 권역이 된다. 종교는 유한하고 현세적인 영뿐만 아니라 영원과 최극위의 영(靈)도 다루려고 가정한다. 우주 인식의 이들 두 극단들은 오직 모타 속에서의 긴 체험을 통해서만 기원, 기능, 관계, 실체, 그리고 운명에 대한 비슷한 해석을 산출할 수 있다. 에너지-영 분산에 대한 최고의 조화로움은 일곱 주(主) 영들의 회로연결 안에 있다; 그것으로부터의 최초 통일은 최극자의 신(神) 속에 있다; 그것으로부터의 최종자 합일은 스스로 이신 이,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무한성 안에 있다.

103:7.13 (1139.5) 이성은 에너지와 물질의 물리적 세계 안에서의 그리고 그 세계와의 체험에 관한 인식의 결정을 인식하는 행동이다. 신앙은 영적인 의식(意識)─다른 인간적 증명이 불가능한 어떤 것─의 정당성에 대한 인식 활동이다. 논리는 신앙과 이성의 합일이 이루는 종합적인 진리-추구 진행이며, 필사 존재들의 구조적인 마음 자질들, 사물들과 의미들과 가치들에 대한 타고난 인식에 기초한다.

103:7.14 (1139.6) 생각 조절자의 현존 안에 영적 실체에 대한 실제 증거가 있지만, 이 현존의 정당성은 외부 세계에 실증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내주하심을 그렇게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조절자에 대한 인식은 진리에 대한 지적 수용과 선(善)에 대한 초(超)마음 인식 그리고 사랑하고자 하는 개인성 동기유발에 기초를 둔다.

103:7.15 (1139.7) 과학은 물질적 세계를 발견하고, 종교는 그것을 평가하며, 철학은 과학의 물질적 관점을 종교의 영적 개념과 조화-협동시키면서 그 의미 해석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 안에서 과학과 종교가 결코 충만하게 동의할 수 없는 그러한 영역이다.

제 8 장. 철학과 종교

103:8.1 (1140.1) 비록 과학과 철학이 그들의 이성과 논리에 의해 하느님의 존재 가능성을 가정할 수 있다 할지라도, 오직 개인적인 종교 체험만이 영의 인도를 받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최극 그리고 개인적 신(神)에 대한 확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가정은 살아있는 진리에 대한 그러한 구체적 실현 기법에 의해서 하나의 종교적 실체가 된다.

103:8.2 (1140.2) 하느님의 확실성 체험에 관한 혼동은 분리된 개별존재들과 서로 다른 인간 종족들에 의해 얻어진 그 체험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그 관계들로부터 발생된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할 수 있지만, 하느님에 관하여 강연하는 것은 지적이고 철학적이기는 하나 여러 가지로 나뉘고 때로는 혼란스럽게 잘못되기도 한다.

103:8.3 (1140.3) 선하고 고귀한 남자가 자기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할 수도 있지만, 결혼에 이른 사랑의 심리학에 관한 필기시험에서 만족스럽게 통과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또 어떤 남자는, 자기 배우자에게 거의 또는 전혀 사랑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시험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통과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참된 자연본성을 살피는 통찰력에서의 불완전성은 그의 사랑의 실체나 혹은 진실성을 조금도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103:8.4 (1140.4) 만약에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신앙으로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한다면─그러한 체험의 실체가, 과학의 의심하는 암시, 논리의 트집 잡기, 철학의 가설, 아니면 하느님 없는 종교를 창조하려는, 좋은-의미를 지닌 혼들의 영리한 제안들 때문에, 그 어떤 면에서도 줄어들거나 손상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103:8.5 (1140.5) 하느님을 아는 종교인들의 확신은 의심하는 물질주의자의 불확신에 의해 교란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믿지 않는 자의 불확신이 체험적 신자의 견고한 신앙과 흔들릴 수 없는 확신에 의해 강한 도전을 받아야만 한다.

103:8.6 (1140.6) 과학에게나 종교에게나 가장 강력한 공헌을 하려면 철학은 물질주의와 범신주의라는 두 극단을 피해야만 한다. 개인성의 실체─변화의 현존 안에서의 영구성─를 깨닫는 철학만이 사람에게 도덕적 가치가 될 수 있고, 물질적 과학과 영적 종교의 이론들 사이의 연락매개자로 봉사할 수 있다. 계시는 진화하는 철학의 허약함을 위한 보완이다.

제 9 장. 종교의 핵심

103:9.1 (1140.7) 신학은 종교의 지적 내용을 취급하며,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측면을 취급한다. 종교적 체험은 종교의 영적인 내용물이다. 종교의 지적 내용이 갖는 신화적 변덕들과 심리적 환상, 실수에 대한 형이상학적 가정들과 자아-기만의 기법들, 종교의 철학적 내용에 대한 정치적 왜곡과 사회경제적 오용들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종교의 영적인 체험은 언제나 참되고 정당하다.

103:9.2 (1140.8) 종교는 사고뿐만 아니라 느낌과 행동 그리고 삶으로 행해야만 한다. 사고는 물질적 삶과 더욱 가깝게 관계되며, 온통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이성과 과학의 사실들에 의해서 지배되어야하고 그리고, 영의 영역을 향하는 그러한 비물질적 뻗침에서는 진리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사람의 신학이 아무리 착각이고 잘못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전적으로 진실 되며 영속적으로 참될 수 있다.

103:9.3 (1141.1) 불교는 그 기원 형태에 있어서 유란시아의 진화 역사에 두루 일어났던, 하느님 없이 이루어진 최상의 종교들 중의 하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앙이 발전됨에 따라 그것은 하느님이 없는 상태로 머물지 않았다. 신앙이 없는 종교는 하나의 모순이다; 하느님이 없는 종교는 하나의 철학적인 불일치이고 지적인 모순이다.

103:9.4 (1141.2) 자연적인 종교의 마술적이고 신화적인 혈통은 후대의 계시 종교와 예수의 종교인 더할 나위 없이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실체와 진리를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마침내 마술적인 미신들과 신화적 환상들 그리고 전통적인 독선주의의 속박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마술과 신화는, 초(超)물질적 가치들과 존재들의 실존 그리고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후대의 우월한 종교를 위하여 길을 매우 효과적으로 예비하였다.

103:9.5 (1141.3) 종교 체험이 비록 하나의 순수한 영적인 주관적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체험은 우주의 객관적 실체의 가장 높은 영역들을 향한 긍정적이고도 살아있는 신앙 태도를 포옹한다. 종교 철학의 이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들의 우주의 무한하신 아버지의 절대 사랑에 분별불가하게 의존하도록 이끌 수 있는 그러한 신앙-신뢰이다. 그러한 참다운 종교 체험은 이상적인 욕구의 철학적 객관화를 훨씬 초월한다; 그것은 실재적으로 구원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그 자신을 오직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것만으로 관여한다. 그러한 종교의 특징들은: 최극의 신(神)에 대한 신앙과 영원한 구원에 대한 희망 그리고 사랑인데, 그 사랑은 특별히 자기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103:9.6 (1141.4) 신학이 종교를 지배할 때 종교는 사라지며; 그것은 생명 대신에 하나의 교리가 된다. 신학의 임무는 개인적인 영적 체험에 대한 자아-의식을 촉진시키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은 종교의 체험적인 주장들을 정의하고 설명하며 해석하고 정당화시키려는 종교적 노력을 구성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살아있는 신앙에 의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우주에 대한 보다 높은 철학에서는, 이성의 지혜가 신앙과 결합하게 된다. 이성과 지혜 그리고 신앙은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인간적 달성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사실들의 세계, 사물들을 가르쳐주며; 지혜는 그에게 진리의 세계, 관계들을 가르쳐주며; 신앙은 그를 신성의 세계, 영적인 체험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103:9.7 (1141.5) 신앙은 이성이 갈 수 있는 최대한도로 이성을 가장 기꺼이 옮겨주고 그 후에는 충만한 철학적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지혜와 동행한다; 그 후에 그것은 오직 진리만이 홀로 동행하는 무제한적이고 끝이 없는 우주 여행을 기꺼이 시작한다.

103:9.8 (1141.6) 과학(지식)은 이성이 정당하다는, 우주가 이해될 수 있다는 선천적인(보조 영)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철학(조화-협동의 이해)은 지혜가 정당하다는, 물질적인 우주가 영적인 존재와 조화-협동될 수 있다는 선천적인(지혜의 영)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종교(개인적인 영적 체험에 대한 진리)는 신앙이 정당하다는,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선천적인(생각 조절자)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103:9.9 (1141.7) 필사자 삶의 실체에 대한 충만한 실현은 이러한 이성과 지혜와 신앙의 가정들에 대해 점진적으로 기꺼이 믿으려는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러한 삶은 진리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그 실존이 물질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객관적 조화우주 실체에 대한 이상이다.

103:9.10 (1142.1) 이성이 일단 옳고 그름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지혜를 드러내며; 지혜가 옳고 그름, 진리와 실수 사이에서 선택하면 그것이 영의 인도를 실증한다. 그리하여 마음과 혼과 영의 작용은 계속 가깝게 연합하며 기능적으로 상호-연관을 이룬다. 이성은 사실적인 지식을 취급한다; 지혜는 철학과 계시를 취급한다; 신앙은 살아있는 영적 체험을 취급한다.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달성하고 영적인 사랑에 의하여 선(善)에 이른다.

103:9.11 (1142.2) 신앙은 신성한 현존에 대한 신비적 느낌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알도록 이끈다. 신앙은 감정적인 결과들에 의해 과도하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참된 종교는 느낌에서의 만족뿐만 아니라, 믿는 것과 그리고 아는 것의 체험이다.

103:9.12 (1142.3) 종교적 체험 속에는 영적인 내용물에 비례하는 실체가 존재하며, 그러한 실체는 이성, 과학, 철학, 지혜, 그리고 다른 모든 인간적 성취들을 초월한다. 그러한 체험의 신념은 무너질 수 없고; 종교적인 삶의 논리는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그러한 지식의 확실성은 초인간적이고; 그 만족감들은 최고로 거룩하고, 그 용기는 굴하지 않으며, 그 헌신은 주저함이 없고, 그 충성심은 더 할 나위 없으며, 그 운명은 최종적─영원하고 궁극적이며 우주적─이다.

103:9.13 (1142.4) [네바돈의 멜기세덱에 의해 제시되었음]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