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랜시아 책 - 제79편 : 동방에서의 안드족속 확장

(USGNY[CM]-KOR-000-1996-3)

유랜시아 책   

부 III: 유랜시아의 역사

제79편 : 동방에서의 안드족속 확장



제79편 : 동방에서의 안드족속 확장

79:0.1 (878.1) 아시아는 인간 종족의 조국(祖國)이다. 안돈훤타가 태어난 곳은 이 대륙의 남부에 있는 어느 반도(半島)였으며; 현재는 아프카니스탄이 된 고원지대에서, 그들의 후손인 바도난이 원시적인 문화 중심지를 세웠고 500,000년 이상 동안 유지되었다. 인간 종족의 이 동부 중심지에서, 안돈족속 혈통으로부터 상익 민족들이 갈라져 나왔고, 아시아는 그들의 최초의 고향이자 최초의 사냥터였고 최초의 전쟁터였다. 남서부 아시아달라마시아인들, 놋족속들, 아담족속들, 그리고 안드족속들로 이어진 문명들을 목격하였고, 이 지역들로부터 근대 문명의 잠재력들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

1. 투르케스탄의 안드족속들

79:1.1 (878.2) 거의 기원전 2,000년경에 이르기까지, 25,000년 이상 동안, 유라시아의 중심부에는 안드족속이 점점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현저하게 많았다. 투르케스탄의 저지대에서 안드족속들은 서쪽을 향해 내륙 호수들을 돌아 유럽으로 들어갔고, 반면에 이 지역의 고지대에서는 동쪽으로 이동해 갔다. 동부 투르케스탄(신강)은 고대의 통로 역할을 하였고, 그보다 미약하기는 하였지만 티벳 역시 그러한 통로였는데, 그곳들을 통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 민족들이 산맥을 넘어 황색인들이 사는 북부 땅으로 들어갔다. 안드족속인도 침투는 투르케스탄 고지대에서 유래되어 펀잡 지방으로 들어갔고 이란의 목초지역으로부터 바루키스탄을 통과해 들어갔다. 이러한 비교적 초창기의 이주들은 결코 정복이라 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안드족속 부족들이 서부 인도중국으로 되풀이하여 떠밀린 것이었다.

79:1.2 (878.3) 거의 15,000년 동안, 혼합된 안드족속 문명 중심지들이 신강(新疆)에 있는 다림 강 분지와 티벳의 고원지대 남부에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안드족속들과 안돈족속들이 광범위하게 혼합되었다. 다림 계곡은 변질되지 않은 안드족속 문화의 동쪽 끝에 있는 전초기지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정착지를 형성하였고 동쪽으로는 진보적인 중국인들과 그리고 북쪽으로는 안돈족속들과 거래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그 당시에, 다림 지역은 비옥한 땅이었으며; 강우량이 풍부하였다. 동쪽으로 고비 지역은 넓게 펼쳐진 목초지였고 목축업이 점차 농업으로 바뀌고 있었다. 비바람이 남동쪽으로 바뀌게 되자 이 지역의 문명이 쇠퇴되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메소포타미아 자체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79:1.3 (878.4) 기원전 8,000년경에, 중앙 아시아의 고지대가 점점 더 건조해짐으로써 안드족속들은 강변과 해변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점점 더 심해지는 이러한 건조 현상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나일, 유프라테스, 인더스, 그리고 황하(黃河)의 계곡들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안드족속 문명에 새로운 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새로운 계급의 사람들인 상인(商人)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많은 숫자를 이루었다.

79:1.4 (879.1) 이주하는 안드족속들이 기후 조건 때문에 사냥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옛날의 인종들이 목축업자가 됨으로써 진화해 갔던 과정을 답습하지 않았다. 상업과 도시 생활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이집트로부터 메소포타미아투르케스탄을 거쳐 중국인도의 강들에 이르는, 더욱 고차원적으로 문명화된 부족들이 도시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생산과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아도니아는 중앙 아시아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는데, 현재의 아쉬카바드라고 하는 도시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돌과 금속 그리고 나무와 도기(陶器)의 교역(交易)이 육지와 해상(海上)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79:1.5 (879.2) 그러나 계속 심화되는 건조 현상은 안드족속으로 하여금 그 지역으로부터 카스피 해 남부와 동부로 대이동(大移動)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주의 물결이 북쪽 방향에서 남쪽 방향으로 바뀌었고, 말을 탄 바벨론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였다.

79:1.6 (879.3) 중앙 아시아의 점점 심해지는 건조 상태는 인구를 더욱 감소시키게 하였고 이 사람들의 호전성을 줄여주었으며; 북쪽 지역의 강우량이 줄어듦으로 말미암아 방랑하던 안돈족속들이 강제적으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안드족속들이 투르케스탄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소위 아리아인들이 레반트인도 지역으로 들어간 마지막 이동이다. 오랫동안 이루어진 아담의 혼합된 후손들의 분산이 절정에 달하였고, 그 동안 아시아의 모든 민족들과 태평양에 있는 섬들의 대부분의 민족들이 우수한 이 인종들에 의해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79:1.7 (879.4) 그리하여, 그들이 동반구(東半球)로 퍼져 나가는 동안, 안드족속들은 메소포타미아투르케스탄에 있는 그들의 본거지(本據地)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안드족속들의 이와 같은 광대한 남쪽으로의 이동 때문에 중앙 아시아안드족속들이 희귀해져서 거의 사라지는 지경에 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79:1.8 (879.5)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 20세기까지도, 우랄알타이 어족(語族)의 민족들과 티벳 민족들 속에는 안드족속 핏줄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 지역에서 때때로 발견되는 금발 유형의 사람들에 의해 증거 된다. 초창기 중국 사료(史料)들은 황하(黃河) 유역(流域)의 평화로운 정착지 북쪽 지역에서 붉은 색 머리를 가진 유목민들이 있었다고 기록하였으며, 옛날에 다림 분지에 금발의 안드족속과 갈색 머리의 몽고족 유형들이 같이 있었음을 정확하게 기록한 그림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79:1.9 (879.6) 중앙 아시아 안드족속들의 숨겨진 군사적 천재성이 마지막으로 크게 나타난 것은, A.D. 1,200년에 징기스칸이 지배하는 몽고아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을 때였다. 그리고 옛날의 안드족속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사(戰士)들은 “하늘에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실존을 전파하였다. 그들의 제국이 일찍 무너짐으로써, 동양서양 간의 문화 교류가 오랫동안 연기되었으며, 아시아에서의 일신교적 개념이 성장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게 되었다.

2. 안드족속의 인도 정복

79:2.1 (879.7) 인도유란시아의 모든 인종들이 섞인 유일한 장소인데, 안드족속의 침입이 마지막 혈통을 더해주었다. 인도의 북서쪽 고지대에서 상익 인종들이 출현하였으며, 초창기에 인도 대륙에 들어온 각 종족의 사람들이 예외 없이 섞임으로써, 유란시아에 이제까지 존재하였던 종족들 중 가장 잡다한 인종을 남겨두었다. 고대의 인도는 이주하는 인종들을 붙잡아두는 웅덩이 역할을 하였다. 그 반도의 출발 지점은, 이전에는 현재보다 약간 좁았으며, 간지스인더스의 삼각주(三角洲) 대부분은 지난 50,000년 세월의 작품이다.

79:2.2 (879.8) 인도에서 있었던 최초의 인종 혼합은, 이주하는 적색 인종과 황색 인종이 토착민인 안돈족속들과 섞인 것이었다. 이 집단은 소멸된 동부의 녹색 민족들의 대부분과 많은 숫자의 오렌지색 인종을 흡수함으로써 나중에 약화되었고, 청색인과 제한적으로 혼합됨으로써 약하게나마 진보를 이루었지만, 많은 숫자의 남색 인종과 혼합됨으로써 크게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소위 인도의 원주민이 이러한 초창기 민족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거의 없으며; 그들은 오히려 남부와 동부 지역에 사는 가장 열등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지역은 초창기의 안드족속들 또는 후대에 나타난 그들의 아리아 동족들에 의해 한 번도 충분하게 흡수되지 못한 곳이었다.

79:2.3 (880.1) 기원 전 20,000년경에, 서부 인도의 주민은 이미 아담의 피로 물들기 시작하였으며, 유란시아의 역사상 한 민족이 그토록 많은 다른 종족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2차적 상익 종족들이 우위를 차지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고, 오래 전의 이 인종적 용광로로부터 청색인과 적색인이 너무 많이 사라진 것은 정말로 하나의 재난(災難)이었는데; 1차적 상익 종족들이 더 많았다면 훨씬 훌륭한 문명이 발생되도록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매우 많이 기여하였을 것이다. 전개된 바와 같이, 적색인은 아메리카에서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있었고, 청색인은 유럽에서 흥겹게 살고 있었으며, 아담의 초창기 후손들(그리고 후대의 후손들 대부분)은 인도아프리카 그리고 다른 어느 지역에서든지 짙은 색깔의 인종들과는 혼합되기를 싫어하였다.

79:2.4 (880.2) 기원 전 약 15,000년경에, 늘어나는 인구에 의한 압력이 투르케스탄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이란으로부터 최초의 정말로 광대한 안드족속 이동이 인도 쪽으로 일어났다. 15세기가 넘는 동안, 우수한 이 민족들이 바루키스탄 고지대를 통하여 쏟아져 들어왔는데, 인더스간지스 계곡으로 퍼져나갔고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여 데칸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북서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안드족속에 밀려서, 남부와 동부에 있던 열등한 사람들이 쫓겨나 버마와 남부 중국으로 들어갔지만, 그 침입자들이 인종적 소멸을 당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숫자는 아니었다.

79:2.5 (880.3) 인도유라시아의 패권을 잡지 못한 것은 주로 지형적(地形的)인 문제 때문이었는데, 인구 팽창으로 말미암아 북쪽에서만 붐비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데칸 지역으로 들어가 영토는 더욱 줄어들었고,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만일 그 부근에 이주해 들어갈 만한 땅이 있었다면, 열등한 민족은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고, 우수한 혈통을 가진 그 사람들이 훨씬 발전된 문명을 성취하였을 것이다.

79:2.6 (880.4) 사실 그랬듯이, 초창기의 이 안드족속 정복자들은 자기들의 주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종족간의 결혼을 엄격하게 금지시키는 규율을 제정함으로써 종족 흡수의 물결을 제거하기 위해 필사적인 시도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족속들은 기원 전 10,000년경에 사라졌지만, 그 민족 대부분은 이렇게 흡수되어 괄목할만한 증진을 이룩하였다.

79:2.7 (880.5) 종족 혼합은, 문화에 다양성을 제공하고 진보적인 문명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항상 유리한 것이지만, 만약에 열등한 요소를 가진 인종적 혈통이 우세할 경우에는, 그러한 성취가 오래가지 못한다.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는, 우세한 혈통이 열등한 사람들과 안전하게 격리된 상태에서 자손을 퍼뜨릴 때에만 유일하게 유지될 수 있다. 열등한 사람들의 자손이 제한 없이 늘어나고, 우수한 사람들의 자손이 줄어들면, 문화적인 문명은 반드시 자멸(自滅)하게 된다.

79:2.8 (880.6) 안드족속 정복자들이 그 당시 그들의 숫자보다 3배가 되었다면, 또는 그들이 혼합된 오렌지색-녹색-남색 주민들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3분의 1을 쫓아내었거나 파멸시켰더라면, 인도는 문화적 문명의 세계적인 중심지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며, 투르케스탄으로 흘러 들어가서 그곳으로부터 유럽으로 건너간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후반기 무리들을 더 많이 끌어들였을 것이 확실하다.

3. 드라비다인의 인도

79:3.1 (881.1) 인도를 정복한 안드족속과 원주민 혈통의 결합은 결국 드라비다인이라 불려 온 혼합된 민족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교적 초창기의 그리고 비교적 더 순수한 드라비다인들은 문화적 성취를 위한 큰 수용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안드족속 유전자가 점점 더 희박해짐에 따라 계속 약화(弱化)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12,000년 전에 인도 문명을 싹트게 하였다. 그러나 아담의 피가 이렇게 적은 양만 주입되었지만, 사회적인 발전에 있어서는 괄목할만한 촉진을 가져왔다. 이렇게 혼합된 혈통은 그 당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문명을 즉각적으로 꽃피웠다.

79:3.2 (881.2) 인도가 정복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드라비다인 안드족속들은 메소포타미아와의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접촉이 끊어졌지만, 나중에 개통된 해안 도로와 대상(隊商) 행로가 이 관계를 다시 회복시켰고, 산악지대 때문에 서쪽과의 교통이 훨씬 활발하기는 하였지만, 지난 10,000년 동안 서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그리고 동쪽으로는 중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79:3.3 (881.3) 인도에 있는 민족들의 우수한 문화적 및 종교적 성향들은 드라비다인이 지배한 초창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초창기 안드족속 침입과 후대의 아리아인 침입의 두 차례에 걸쳐, 수많은 셋족속 제사장들이 인도에 들어왔다는 사실에도 부분적으로 기인된다. 인도의 종교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던 일신교의 가느다란 빛은 두 번째 동산의 아담족속들의 가르침으로부터 그렇게 유래되었다.

79:3.4 (881.4) 이미 기원 전 16,000년경에 100명에 이르는 셋족속 제사장들 일행이 인도에 들어왔으며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그 민족의 절반에 해당하는 서쪽 지역에 대한 종교적 정복을 거의 성취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계속 유지되지 않았다. 5,000년이 지나기 전에, 낙원 삼위일체에 관한 그들의 교리들은 화신(火神)의 삼위일체적 상징으로 퇴화되었다.

79:3.5 (881.6) 그러나 안드족속 이주가 끝나기까지, 7,000년 이상 동안, 인도에 사는 주민들의 종교적 상태는 세계 대부분의 상태보다 훨씬 높았다. 이 시기 동안, 인도는 지도적인 세계의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상업적 문명을 산출할 가능성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민족들에 의해 안드족속들이 완전히 침몰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운명이 아마도 실현되었을 것이다.

79:3.6 (881.6) 드라비다의 문화적 중심지들은 강이 있는 계곡들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대개 인더스간지스 지역이었으며, 데칸에서는 3개의 큰 강물이 동부 가트 지역을 흘러서 바다로 들어갔다. 서부 가트의 해변을 따라 형성된 정착지들은 수메르와 해상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이점(利點)을 갖고 있었다.

79:3.7 (881.7) 드라비다 사람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육상(陸上)과 해상(海上)의 광대한 수출입 업무에 종사한 최초의 민족들에 속하였다. 기원 전 7,000년경에는 낙타 행렬이 메소포타미아의 먼 지역까지 정기적으로 여행하였으며; 드라비다의 선박은 해안을 따라 활동하였는데, 아라비아 해를 지나 페르시아 만에 있는 수메르의 도시들까지 이르렀으며, 해상(海上)에서 모험을 감행하여 벵갈 만(灣)을 지나 동인도 제도(諸島)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해상 여행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알파벳과 글 쓰는 기술이 수메르로부터 수입되었다.

79:3.8 (881.8) 이러한 상업적인 관계들은 세계적인 문화를 더욱 다양화 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도시 생활의 많은 진보와 심지어 사치품들이 일찍부터 출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중에 나타난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안드족속 동족들이 상익 인종들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을 드라비다인들 속에서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잘-증진된 문명은 발견할 수 있었다. 생물학적인 제한조건에도 불구하고, 드라비다인들은 우수한 문명을 건설하였다. 그것은 인도 전역으로 잘 확산되었으며 데칸 지역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왔다.

4. 인도의 아리아인 침입

79:4.1 (882.1) 안드족속의 두 번째 인도 침투는, 그리스도 이전(以前) 2,500년 부근의 거의 500년 기간 동안에 일어난 아리아인 침입이었다. 이 이주(移住)는 안드족속들의 고향인 투르케스탄으로부터의 마지막 탈출을 이룩하였다.

79:4.2 (882.2) 초창기의 아리아인 중심지들은 인도의 북쪽 지역 절반 부분에 산재해 있었는데, 특별히 북서부에 많았다. 이 침입자들은 그 나라를 완전히 정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나중에 히말라야 지방을 제외한 전체의 반도를 휩쓸게 되었던 남부의 드라비다인들에 의해 흡수될 정도로 그들의 숫자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이러한 태만 속에서 파멸을 맞이하게 되었다.

79:4.3 (882.3) 아리아인들은 북쪽 지방들을 제외하고는 인도에서 인종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였다. 데칸에서의 그들의 영향은 인종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고 종교적이었다. 북부 인도의 소위 아리아인 핏줄의 더 강한 영속성은, 이 지역에서 그들의 현존 숫자가 훨씬 많았던 것에 기인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후대의 정복자들과 상인들 그리고 선교사들에 의해 보강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이전 1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리아인 핏줄의 계속적인 침투가 펀잡 지방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지막 유입(流入)은 헬라 민족들의 출정(出征)에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79:4.4 (882.4) 간지스 강의 평원에서 아리아인드라비다인이 결국 혼합되어 하나의 고상한 문화를 창출하였으며, 이 중심지는 나중에 중국으로부터 온 북동쪽으로부터의 기여(寄與)에 의해 보강되었다.

79:4.5 (882.5) 인도에서는, 아리아인들의 유사민주주의 체제로부터 전제적이고 군주적인 정부 형태에 이르는, 여러 유형의 사회 조직들이 때때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가장 독자적인 특색은, 인종적 주체성을 영존시키고자하는 노력으로 아리아인들에 의해 설립된 지체 높은 사회적 특권계급들을 끈질기게 고수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교한 계급 체계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79:4.6 (882.6) 네 개의 큰 특권계급들 중, 첫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는 아리아인 정복자들이 자신들보다 열등한 백성들과 인종적으로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한 하찮은 노력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특권계급인 선생-제사장들은 셋족속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의 브라만들은, 비록 그들의 가르침이 그들의 저명한 조상들의 것과 크게 다르기는 하지만, 두 번째 동산의 제사장들의 문화적 직계 후손들이다.

79:4.7 (882.7)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두 번째 동산에 있었던 종교의 남아있는 전통들을 보존해 왔던 그대로 신격에 대한 자기들의 개념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만 사제들은, 아리아인들의 멸종 이후에 데칸의 열등한 종교와 갑작스럽게 접촉함으로써 세워진 다신교적(多神敎的) 타성(惰性)을 전혀 이겨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주민은 열등한 종교들의 노예화시키는 미신들의 굴레에 속박되고 말았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인도는 초창기 시대에 징조를 보여 왔던 고상한 문명을 창출하는 데 실패하였다.

79:4.8 (882.8) 그리스도 이전 6세기의 영적 각성이 인도에서는 유지되지 못하였으며, 모하메드교 침투 이전에 이미 소멸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더 위대한 석가(釋迦)가 나타나 모든 인도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도록 인도할 것이며, 그 때가 되면 온 세상 사람들은 보수적인 영적 통찰력의 무감각한 영향력 밑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혼수 상태에 있었던 다재다능한 한 민족의 문화적 잠재력들의 결실(結實)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79:4.9 (883.1) 문화는 생물학적인 기초 위에서 존재하지만, 계급만으로는 아리아인 문화를 존속시킬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종교 즉 참된 종교가, 인간의 형제관계에 기초를 둔 우수한 문명을 설립하도록 사람들을 내모는 고차원적 에너지의 필요 불가결한 근원이기 때문이다.

5. 적색인과 황색인

79:5.1 (883.2) 인도에 관한 이야기가 안드족속의 정복에 관한 것 그리고 종국에는 보다 오래된 진화적 민족들 속으로 스며들어간 것에 관한 것인 반면, 동부 아시아에 관한 이야기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상익, 특히 적색인 및 황색인과 관계된다. 이 두 인종들은, 청색인으로 하여금 유럽에서 크게 발달이 뒤떨어지게 하였던 저질(低質)의 네안델탈 종족과의 혼합을 거의 겪지 않았고, 그리하여 첫 번째 상익 유형의 우수한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79:5.2 (883.3) 초창기의 네안델탈인들이 유라시아 전체에 퍼진 반면, 동쪽 부분은 저질의 동물적 종족들에 의해 더 많이 오염되었다. 이러한 유인원(類人猿) 유형들은 다섯 번째 빙하기에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는데, 바로 그 빙하 때문에 상익이 동부 아시아로 이주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적색인이 인도의 고원지대를 돌아 북동쪽으로 이동하였을 때, 그들은 북동쪽 아시아에 이 유인원 유형의 사람들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적색 인종들의 부족 조직은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도 먼저 형성되었고, 상익 인종들의 중앙 아시아 중심지로부터 이주한 최초의 인종이었다. 열등한 네안델탈 종족들은, 나중에 이주하는 황색 부족들에 의해 파멸되거나 아니면 본토로부터 쫓겨났다. 그러나 적색인은, 황색 부족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거의 100,000년 동안 동부 아시아를 호령하고 있었다.

79:5.3 (883.4) 300,000년 보다 더 이전에 황색 인종의 본대(本隊)가 남쪽으로부터 해안을 따라 이주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매 1,000년마다 그들은 점점 더 깊숙이 내륙으로 들어갔지만, 티벳으로 이주한 형제들과는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마주치지 않았다.

79:5.4 (883.5) 북쪽으로 이동하던 황색 인종은 인구가 과도하게 팽창됨으로써 적색인의 사냥터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침입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인종적 적개심과 함께 최고 지점까지 호전성(好戰性)을 부추겼고, 그리하여 아시아의 더 먼 곳에 있는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혹독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79:5.5 (883.6) 적색 인종과 황색 인종 사이에 있었던 오랜 세월 동안의 이 이야기는 유란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서사시(敍事詩)와도 같다. 200,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들 두 우수한 인종들은 더욱 격심하고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다. 초창기의 투쟁에서는 대체적으로 적색인들이 우세하여, 습격을 담당하는 그들의 무리들은 황색인 정착지를 황폐화시키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황색인은 전쟁의 기술을 배우는 데 있어서 매우 기민하였으며, 동포들과 평화롭게 사는 상당한 능력을 일찍부터 나타내고 있었는데, 합동하는 것에 힘이 있음을 처음으로 배운 것은 그 중국인들이었다. 적색 부족들은 내부적인 투쟁을 계속하였으며, 이윽고 그들은 냉혹한 중국인들의 적극적인 공격에 계속 패배를 맛보기 시작하였고 중국인들은 끊임없이 북쪽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79:5.6 (883.7) 100,000년 전에, 많은 사람들을 잃은 적색 인종의 부족들은, 뒤로는 마지막 빙하기의 퇴각하는 얼음 덩어리와 싸워야 하였으며, 베링 해협을 지나 육로(陸路)를 통하여 동쪽으로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이 부족들은 야박스러운 아시아 대륙 해안을 서슴없이 떠나게 되었다. 순수한 적색 인종이 마지막으로 아시아를 떠난 지 85,000년이 지났지만, 오랜 기간의 투쟁은 승리를 거둔 황색 인종에게 유전적인 흔적을 남겨 두었다. 안돈족속 시베리아인들과 함께, 북부 지역의 중국 민족들은 적색 혈통을 많이 닮았으며 그것에 의해 상당한 정도의 유익을 얻었다.

79:5.7 (884.1) 북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담이브안드족속 후손과 전혀 접촉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아담의 도래보다 약 50,000년 전에 그들의 고향이었던 아시아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안드족속이 이주하는 기간 동안, 순수한 적색 종족들이 방랑하는 부족, 즉 농사를 약간 짓는 사냥꾼이 되면서 북 아메리카 전역에 퍼졌다. 이 인종들 및 문화 집단들은, 그리스도교 시대의 첫 1,000년이 끝날 무렵, 유럽의 백색 인종들에 의해 그들이 발견될 때까지,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래 세계의 다른 민족들과 거의 완벽하게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 때까지, 북쪽에 있는 적색인 부족들이 보았던 사람들 중에서 에스키모들이 백색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79:5.8 (884.2) 적색 인종과 황색 인종은, 안드족속들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가장 발달된 문명을 이룩한 유일한 인간 혈통이었다. 최고로 오래된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오나모나론톤이었지만, 이것은 오래 전인 기원 전 35,000년경에 사라졌다. 중앙 아메리카멕시코남 아메리카의 산악지대에서는, 보다 후대의 그리고 보다 오래 지속된 문명들이, 주로 적색 인종이지만 황색과 오렌지색 그리고 청색 인종이 상당히 섞여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79:5.9 (884.3) 이 문명들은 상익 인종들의 진화적인 산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족속 핏줄의 흔적이 페루에서도 발견된다. 북 아메리카에스키모남 아메리카에 있는 소수의 폴리네시아 안드족속들을 제외한다면, 서반구(西半球)의 민족들은 그리스도 이후 첫 1,000년이 끝날 무렵까지 세계의 다른 인종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유란시아 종족들을 개선시키기 위한 멜기세덱의 원래 계획에서는, 아담의 순수-계통 후손들 중 100만 명이 아메리카의 적색인들을 증진시키기 위해 나아가게 되어 있었다.

6. 중국 문명의 태동

79:6.1 (884.4) 적색인이 북 아메리카로 쫓겨 건너간 후 어느 시기에, 확장하는 중국인들이 동부 아시아의 강 유역들로부터 안돈족속들을 몰아내었는데, 북쪽으로는 시베리아로 그리고 서쪽으로는 투르케스탄으로 그들을 밀어내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곧 안드족속들의 우수한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79:6.2 (884.5) 버마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인도중국의 문화들이 혼합되고 섞여져서 그 지역에 계속적인 문명들을 창출하게 하였다. 이곳에서는, 사라진 녹색 인종이 세계의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더 많은 비율로 존속되어 오고 있다.

79:6.3 (884.6) 많은 다른 인종들이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하였다. 일반적으로, 남쪽의 섬들이, 그 다음에는 광범위한 지역의 섬들이, 높은 비율의 녹색과 남색 피를 간직한 민족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북쪽의 섬들은 안돈족속들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나중에는 황색 혈통과 적색 혈통 중 큰 부분을 포함하는 인종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일본인 민족의 조상들은 기원 전 12,000년까지 본토에서 쫓겨나지 않고 있다가, 그 때 북쪽에 있는 중국인 부족들이 남쪽 해안을 따라 강력하게 밀려 내려옴으로써 쫓겨나게 되었다. 그들의 최종적인 탈출은 인구 팽창의 압력에 기인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신성한 인물로 간주하게 된 어떤 족장(族長)의 주도권에 기인된 것이었다.

79:6.4 (885.1) 인도레반트의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황색인의 다양한 부족들은 해안선과 강줄기를 따라 초창기의 중심지들을 건설하였다. 연안(沿岸)에 있는 주거지들은 나중에 홍수가 증가하면서 살아가기 힘들게 되었고, 강줄기의 변경은 낮은 지역에 있는 도시들이 지탱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79:6.5 (885.2) 20,000년 전에, 중국인들의 조상들은 12개에 달하는 원시적인 문화와 교육의 강력한 중심지들을 건설하였었는데, 특별히 황하(黃河)와 양쯔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때 이 중심지들은 신강(新疆)티벳으로부터 꾸준히 밀려들어오는 피가 섞인 우수한 민족들이 도착됨으로 인하여 보강되기 시작하였다. 티벳으로부터 양쯔강 계곡으로의 이주는 북쪽에서 일어난 것처럼 광대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티벳의 중심지들도 다림 분지의 중심지들만큼 발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두 무리들은 상당한 양의 안드족속 핏줄을 갖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강변(江邊)에 정착하였다.

79:6.6 (885.3) 고대 황색 인종의 우수성은 네 가지 큰 요소들로부터 기인되었다:

79:6.7 (885.4) 1. 유전적 요인. 유럽에 있는 그들의 청색 동족들과는 달리, 적색 인종과 황색 인종은 저질(低質)의 인간 혈통들과 혼합되는 것을 대개 피할 수 있었다. 우수한 적색 종족과 안돈 종족이 약간 섞인 북부의 중국인들은, 안드족속 피가 상당히 유입됨으로써 곧 유익을 얻게 되었다. 남부의 중국인들은 이러한 면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녹색 인종의 흡수로 인하여 오랫동안 수난을 당하였고, 반면에 나중에는 드라비다-안드족속 침입으로 말미암아 인도에서 도망 나온 열등한 민족들 무리가 침투함으로써 훨씬 약화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에는 북부 지역의 인종과 남부 지역의 인종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79:6.8 (885.5) 2. 사회적 요인. 황색 인종은 자기들끼리의 평화에 대한 가치를 일찍부터 습득하였다. 그들의 내부적인 평화 유지 능력은 인구 증가에 막대하게 기여하였고 그들의 문명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퍼지도록 만들었다. 기원 전 25,000년부터 5,000년에 이르기까지, 유란시아에서 가장 높은 집단적 문명은 중국의 중앙과 북부 지역에 있었다. 황색인이 인종적 결속을 처음으로 성취하였다--큰 규모의 문화적, 사회적, 및 정치적 문명을 처음으로 달성함.

79:6.9 (885.6) 기원 전 15,000년의 중국인은 공격적인 군국주의자들이었으며; 옛 사람들을 과도하게 숭상함으로써 약화되는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1,200만 명 미만의 인구를 가진 그들은 간단한 신체적 표현으로 공통 언어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 동안에, 그들은 실제적인 국가를 형성하였는데, 역사 시대에 이룩한 그들의 정치적 합동들보다도 훨씬 더 결합되었고 균질성(均質性)을 갖고 있었다.

79:6.10 (885.7) 3. 영적 요인. 안드족속이 이주하던 시기 동안, 중국인들은 이 세상에 있는 비교적 더 영적인 민족들 중 하나였다. 싱글랑톤이 전한 하나의 진리에 대한 경배에 오랫동안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인종들보다 가장 우위(優位)를 지킬 수 있었다. 진보적이고 발전된 종교에 의한 자극이 때로는 문화적 발전에 중대한 요소가 되기도 하는데, 인도가 쇠약해졌을 때, 중국은 진리를 최고의 신격(神格)으로 모시는 한 종교의 활기찬 자극 아래에서 서서히 앞으로 나갔던 것이다.

79:6.11 (885.8) 이러한 진리에 대한 경배는 자연 법칙과 인류의 잠재력에 대한 연구와 대담한 탐구를 유도하였다. 6,000년 전까지도 중국인들은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여전히 예민한 학생들이었고 적극성을 띠고 있었다.

79:6.12 (885.9) 4. 지형적 요인. 중국은 서쪽으로는 산들에 의해 그리고 동쪽으로는 태평양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오직 북쪽으로만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으며, 적색인의 시대부터 후대의 안드족속 자손들이 도래할 때까지, 북쪽 지역은 어떤 공격적인 종족에 의해서도 점령되지 않았었다.

79:6.13 (886.1) 또한 산에 의한 장벽이 없었다면, 그리고 영적 문화에 있어서 후대(後代)의 퇴보가 없었다면, 황색 인종은 투르케스탄으로부터 이주하는 안드족속의 대부분을 끌어들일 수 있었음이 분명하며, 그렇게 되었다면 틀림없이 세계 문명을 재빨리 지배하였을 것이다.

7. 중국에 들어온 안드족속들

79:7.1 (886.2) 약 15,000년 전에, 상당한 숫자의 안드족속들이 티 타오 고개를 넘었고 칸수에 있는 중국인 정착지들 중에서 황하 상류 계곡으로 퍼져 나갔다. 이윽고 그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호난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착지들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서쪽으로부터 침투한 사람들은 반(半)은 안돈족속이고 나머지 반은 안드족속이었다.

79:7.2 (886.3) 황하 유역을 따라 이루어진 북쪽의 문화 중심지들은, 양쯔강에 있는 남쪽 정착지들보다 항상 더 진보를 이룩하였다. 소수의 무리이기는 하였지만 우수한 이 필사자들이 도착된 후 수천 년 내에, 황하 유역의 정착지들은 양쯔강 마을들보다 앞서 나갔고, 그 후에 유지되었던 모든 남부에 있는 그들의 동족들보다 우위(優位)를 차지하였다.

79:7.3 (886.4) 그것은 그곳에 훨씬 더 많은 안드족속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고, 그들의 문화가 훨씬 우수하였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오직 그들과의 혼합으로 더욱 다재다능한 혈통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북부의 중국인들은 그들의 선천적인 유능한 정신들을 약간 자극하기에 겨우 충분할 만큼 안드족속 종족을 받았지만, 북부에 있는 백색 인종들의 특질처럼 끊임없이 탐구심을 갖는 호기심이 고무될 정도로 충분히 받지는 못하였다. 안드족속 유전형질의 이러한 더욱 제한적인 주입은 상익 유형의 타고난 안정성을 별로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79:7.4 (886.5) 후대에 이동한 안드족속은 향상된 특정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를 가져왔으며; 이것은 특별히 서쪽으로부터 이동한 마지막 물결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들은 북부 중국인들의 경제적 교육적 관습들을 크게 증진시켰으며; 반면에 황색 인종의 종교적 문화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오래 가지 못하였고, 그들의 먼 후손들이 나중에 일어난 영적 각성에 많이 기여하였다. 그러나 에덴달라마시아의 아름다움에 대한 안드족속 전승들이 중국의 전승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초창기 중국의 전설들은 “신(神)들의 땅”이 서쪽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79:7.5 (886.6) 중국인 민족은 기원 전 10,000년이 지날 때까지, 즉 투르케스탄에 기후 변화가 발생하고 후대의 안드족속들이 도착한 후까지, 도시 건설을 시작하지 못하였고 제조업에 종사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핏줄의 주입은, 황색인의 문명에 많이 기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수한 중국인 혈통들의 잠재적인 경향이 더 깊이 그리고 빠르게 발전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호난으로부터 셴시에 이르기까지, 진보된 문명의 잠재력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금속 가공과 모든 제조 기술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79:7.6 (886.7) 시간 계산과 천문학 그리고 정부 경영에 대한 중국의 방법과 메소포타미아의 방법 일부가 비슷한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두 중심지들 사이의 상업적 관계로부터 기인되었다. 중국의 상인들은 수메르인 시대에 이미 육로(陸路)를 통하여 투르케스탄을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여행하였다. 이러한 교환은 일방적인 것도 아니었다--유프라테스 계곡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었고, 갠지스 평원의 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후 변화와 그리스도 이전 3,000년경의 유목민 침입으로 말미암아, 중앙 아시아의 대상로(隊商路)를 지나가는 무역 거래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8. 후대의 중국 문명

79:8.1 (887.1) 적색인이 너무 많은 전쟁으로 인하여 시달린 반면, 중국인들 가운데에서의 국가체제의 발달은 그들이 아시아를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연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인종적 결속(結束)을 이룩할 수 있는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었지만, 외적(外的)인 공격에 항상 수반되는 위험성에 대응되는 계속적인 강렬한 충동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적절하게 발전되지 못하고 말았다.

79:8.2 (887.2) 동부 아시아 정복의 완료와 함께, 고대의 군사적(軍事的) 체제가 서서히 붕괴되었다--과거의 전쟁들은 잊혀졌다. 적색 인종과 투쟁하였던 이야기들 중에서, 활 쏘는 민족들과의 오래 전의 투쟁에 대한 희미한 전승만이 남아 있었다.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농업으로 돌아섰고, 그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그들의 성향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동시에 농사를 짓기에 필요한 땅에 대한 인구의 비율이 상당히 낮은 것도 그 나라의 평화로움을 증대시키는 일에 더욱 기여하였다.

79:8.3 (887.3) 과거의 성취(현재는 어느 정도 쇠퇴한)에 대한 의식과 압도적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민족의 보수적 경향 그리고 잘 발달된 가정생활이 조상숭배(祖上崇拜)를 탄생시켰는데, 조상에 대한 존경이 극에 달한 나머지 숭배와 비슷한 상태로까지 이르렀다. 그리스-로마 문명이 붕괴된 후 거의 500년 동안 유럽에 있는 백색 인종들 가운데에서 매우 비슷한 태도가 유행된 적이 있었다.

79:8.4 (887.4) 싱글랑톤이 가르쳤던 “하나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경배는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롭고도 더 높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경향은, 이미 설립된 것을 공경하려는 경향이 커짐으로써 빛을 잃게 되었다. 황색 인종 중 천재성이 있는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추구하려는 태도로부터 이미 알려진 것을 보존하려는 태도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신속하게 진보하던 문명이 정체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79:8.5 (887.5) 기원 전 4,000년으로부터 500년 사이에, 황색 인종의 정치적인 재통합(再統合)이 이룩되었지만, 양쯔강황하에 있는 중심지들의 문화적 합동은 이미 이룩되어 있었다. 후대의 부족 집단들의 정치적인 재통일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에 대한 사회적 견해는 빈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조상 숭배와 늘어나는 숫자의 방언들 그리고 수천 년 동안의 군사적 행동 부재(不在)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과도한 평화를 누려 왔었다.

79:8.6 (887.6) 발전된 국가체제로 일찍부터 발전될 가능성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황색 인종은 문명의 기술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농업과 원예술의 영역에 있어서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셴시호난에서는 농민들이 물을 이용하는 문제에 부딪혔고 그 해결을 위해 집단적인 협동이 요구되었다. 그러한 관개(灌漑)와 토양-보존의 문제들은, 상호의존(相互依存)의 발달에 상당히 기여하였고 나중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집단들 간의 평화 증진을 가져왔다.

79:8.7 (887.7) 곧, 기록하는 기술이 발달되고 학교들이 설립됨으로써,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식이 보급되도록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인쇄술이 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표의문자(表意文字) 체제의 복잡한 특성 때문에 지식인 계층의 숫자가 매우 제한되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사회적인 표준화(標準化)와 종교-철학적 교리화(敎理化)에 대한 진행이 빠른 속도로 계속 진행되었다. 조상 공경의 종교적 발전은, 자연 숭배를 포함하는 미신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더욱 복잡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개념의 남아있는 흔적이 샹-티라는 황제 숭배 사상 속에 남아 있었다.

79:8.8 (888.1) 조상 공경의 중대한 약점은 회고적(回顧的)인 사상을 증진시킨다는 점이다. 과거의 사람들로부터 지혜를 수집하는 것이 아무리 현명하다 할지라도, 과거의 사람들을 유일한 진리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을 일이다. 진리는 상대적이고 확장되는 것이며; 그것은 현재 속에서 항상 살아있어서, 각각의 인간 세대들마다--심지어 각각의 인생들마다-- 새로운 표현을 이룩한다.

79:8.9 (888.2) 조상 공경의 가장 큰 장점은 그러한 태도가 가족에게 미치는 유용성(有用性)이다. 중국인 문명의 놀랄만한 안정성과 지속성은 최고의 상태로 화합된 가족의 결과인데, 왜냐하면 문명은 가족의 효과적인 기능발휘에 직접적으로 의존되기 때문이며; 중국에 있어서의 가족은 사회적 중요성을 달성하였고, 심지어 종교적인 의미를 달성하였는데, 다른 민족들이 이것을 시도한 경우는 거의 없다.

79:8.10 (888.3) 증대되는 조상 숭배의 종파(宗派)에 의해 강요되는 자식으로서의 헌신과 가족에 대한 충성은, 뛰어난 가족 관계 형성과 영구적인 가족 집단의 형성을 보장하였으며, 문명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촉진시켰다:

79:8.11 (888.4) 1. 재산과 부(富)의 보존.

79:8.12 (888.5) 2. 한 세대 이상의 경험이 쌓이게 함.

79:8.13 (888.6) 3. 과거의 기술과 과학에 있어서의 자녀들에 대한 효과적인 교육.

79:8.14 (888.7) 4. 의무에 대한 강한 인식의 발달, 도덕성(道德性)의 증진, 그리고 윤리적 민감성(敏感性)의 증대.

79:8.15 (888.8) 안드족속들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던, 중국 문명의 형성 기간은 그리스도 이전 6세기의 엄청난 윤리적, 도덕적, 그리고 반(半)종교적 각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전승(傳承)은 진화적인 과거에 대한 어렴풋한 기록 즉; 어머니 중심의 가족으로부터 아버지 중심의 가족으로의 전환, 농업의 확립, 농업의 발달, 산업의 개시를 보존하였다.--이 모든 것들이 연속적(連續的)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른 어떤 비슷한 설명들보다도 훨씬 정확하게, 미개한 수준으로부터 우수한 민족이 훌륭하게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 동안에 그들은 원시적인 농업사회로부터 보다 고차원적인 사회적 체제로 발전되었는데, 그 체제는 도시들, 제조업, 금속 가공, 상업 교역, 정부, 기록, 수학, 예술, 인쇄 등을 포함한다.

79:8.16 (888.9) 그리하여 황색 인종의 고대 문명은 여러 세기들 동안 계속 전해져 내려왔다. 최초의 중요한 발전이 중국인 문명에 발생된 이래 거의 40,000년이 지났으며, 여러 차례 퇴보의 과정이 있었지만, 의 아들들이 세운 문명은 20세기 시대까지 내려오는 계속적인 진보의 완전한 그림을 보여줄 정도로 거의 모든 것이 전해지고 있다. 백색 인종들의 기계적인 발전과 종교적인 발전이 하나의 고차원적인 체제를 이룩하고는 있지만, 가족의 충성심이나 집단적 윤리 또는 개인적 도덕성에 있어서는 중국인보다 뛰어난 적이 없었다.

79:8.17 (888.10) 이러한 고대의 문화는 인간의 행복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수많은 인간 존재들이 그 업적에 의해 혜택을 받으면서 살다가 죽었다. 이 위대한 문명은 수세기 동안 과거에 얻었던 명예로 만족해 왔지만, 필사자 실존의 초월적인 목표를 새롭게 계획하기 위해, 즉 영원한 진보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을 다시 한 번 시작하기 위해 지금도 각성을 하고 있다.

79:8.18 (888.11) [네바돈천사장에 의해 제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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